일본군은 전국적으로 위안소를 설치하였다. 피해자들의 연령대는 11 .12살에서 ~ 43살 정도로
대부분이 16~17세이었으며, 수적으로 한국인이 가장 많았는데
우리나라에서만 20여 만 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중략)
[ 한일협정의 한일간 청구권협정 - 배경과 의미 / 문제점 ] 본문 일부 발췌
한.일
1. 식민지 지배의 강제성은 일부 인정.
2. 병합과정의 강제성을 인정하지 않음.
한국 병합은 아직 합법적인 조치로 남게 됨.
3. 피해에 대한 보상과 구체적 언급이 되지 않아
일본은 과거사 청산에 대한 의지가 부족.
2-1. 일본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
1) 일본역사 교과서 왜곡의 배경
문제시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정도로 독도는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독도 문제는 그 역사가 매우 오래된 것이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 독도를 둘러싼 분쟁을 비롯한 각종 사건은 옛날의 기록에도 종종 등장한다. 독도의 영유권을 둘러싼 한일간의 다툼은 한국이 광복한 뒤 본격화되었으
일본 관동군참모로 하여금 만주점령을 기도, 봉천 교외 유조구의 만철 철도를 파괴케 하였다. 관동군사령관 목장번은 이를 중국군의 소행이라 질타하고 총공격을 명하여 마침내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청의 폐제 부의로 하여금
「만주국(滿洲國)」이란 괴뢰정권을 수립케 하였다(1932년 3월). 이에 중국
예산 지원을 건의했다.
'실효적 지배'를 앞세워 '무대응이 상책'이라는 입장을 견지해 왔던 정부가 시마네발 독도왜란 이후 적극적인 공세로 돌아섰다.
노무현 대통령의 3·1절 기념사와 대국민 담화 '대일 신독트린' 등 이전과 달리 우리 정부는 일본을 상대로 '할 말'을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