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는 어느 나라나 처음에는 왕가의 계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른바 「왕대실록」이니 「원록(源錄)」이니 왕실의 계통을 기록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각 씨족의 족보가 발달한 것은 과연 언제부터인가에 대하여는 이를 명백하게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중국의 한나라 시대부터 이것이
사물의 이치에 총명하므로 성은 문(文) 이름을 다성(多省)이라 하였다 이이가 남평문씨의 시조가 되었다.
-『남평문씨족보』-
서론
1. 족보편찬
1)혈통의 귀천과 가격(家格)의 판정 기준
2)응시·출사·승음(承蔭) 및 혼인에 이르기 까지 크게 영향
족보는 혈통과 가격을 증빙하는 근거
족보』의 서두를 장식하는 성씨시조 신화이다. 조선조 후기에 족보나 세보의 간행이 일반화되면서 많은 가문에서 족보의 서두에 성씨 시조신화들을 첨부하여 그 가문의 신화적 연원을 드러내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사람들은 왜 이토록 족보에 신화적 연원을 넣으면서까지 족보편찬의 열의를 보였을
족보보다 작은 규모의 족보라 할 수 있다. 주로 한종파별로 정리되며, 각각 세부사항에따라, 형태및 수록 내용이 변할 수 있다.
○만성보
만성보는 조선 초기부터 편찬되었다고 추정되어지며, 15세기에 편찬되었던 기록이 남아있다. 명문가를 중심으로 간략하게 본관, 지파 정도만 기록되어 있다. 한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조선 건국 초기
(1) 족보기재순서
조선 건국 초기에는 남자와 거의 동등한 대우를 받았던 여자의 지위가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조선 초기에는 아들딸 구별 없이 출생 순으로 기록했다. 게다가 초기에는 여성의 이름이 적혀져 있는 족보도 간간히 등장할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