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였으며, 왜 그 대상은 민중이었는가. 5월 18일 전남대 정문에서부터 시작된 공수부대와 투쟁세력과의 마찰은 이후 한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대 정권의 12.12쿠테타에 이은 대(對)민중의 5.17쿠테타로 기록되고 있다. 광주민중항쟁은 많은 한계 속에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전략적으로 볼 때
광주지역은 무진군에 속하고, 현재 광산구 본량․ 임곡 일대에 수천현이 있었고, 현 광산구 평동, 삼도, 나주 노안면 일대에 북룡현이 있었다. 무진군은 뒤에 무진주로 승격되었으며 일명 노지 라고도 하였다.
통일신라시대인 677년에 무진도독이라 하여 도독으로 천훈이 파견되었으며, 757년에 행정
Ⅱ. 광주민중항쟁의 발생배경
1. 계속적인 군부의 집권의지와 민주화 항쟁
1961년 5·16 군사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 독재정권은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경제성장에 집착하였고 솟구치는 민주화 운동에 대한 극심한 탄압으로 일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화운동은 전국
I. 5·18광주민중항쟁의 성격
1980년 5월 광주에서는 한국 현대사중 가장 비극적이고 추악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신군부의 12·12 하극상 쿠데타로부터 시작된 정권찬탈음모는 결국 80년 5월, 광주시민의 고귀한 생명을 앗아갔고 계엄군의 도청 진압작전으로 광주민중항쟁은 외형상 그 막을 내리게 되었
광주)을 끄집어내어 그것에 대해 물음을 던져보고 그 속에서 오늘날 우리 사회에 대한 고민을 보다 구체적으로 정립해보고자 하는 작은 기대에서 비롯된 작업이다. 그 동안 이땅에 민주화가 이룩되고 5.18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역사적 논의가 가능하게 되면서 많은 연구들이 진행되어 왔다. 필자가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