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항쟁은 1980년대를 지나면서 사실상 패배가 아닌 역사의 승리였으며, 당시 광주에서 죽어간 생명들은 무의미한 희생이 아닌 부활의 영웅이었음이 증명되고 있다. 광주민중항쟁은 그 당시에는 패배한 항쟁이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오히려 그 패배를 통하여 1980년대 반독재 민주의식과 민주화운동
광주민주화운동은 남파 간첩들이 주동이 되어 광주시민들이 난동을 부린 사건으로 묘사한 내용을 방영하였다. 그러나 김대중, 정동년은 광주상황이 발발하기 전인 5월 17일 저녁에 예비 검속된 상태였기 때문에 5·18민중항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신군부 세력은 12·12군사반란을 통한 정권장악
광주 지역의 사회운동 진영에서 정부의 거짓된 선무방송을 이겨내기 위해 발행되었다. 광주 서구 광천동에 위치한 들불야학의 교사와 학생들이 모여 만든 B5용지 1장짜리 유인물이다. 5월 21일에 1호가 발간되어 25일까지 8호가 발간되었다. ‘해방광주’ 이후 민주시민회보로 이름을 바꾸어 10호를 발간
)되었고 내무부 장관과의 대화를 통해 안전귀가를 보장받는 대신 학교로 퇴각할 것을 결정하게 되었다.
이래 서울지역 대학가가 잠잠한 가운데 16일 발생한 지방 23개의 대학의 시위참여자가 3만명인데, 그 중 2만명이 광주지역의 참가자였다는 사실은 광주를 타깃으로 하게 된 이유로 충분했다.
광주민중항쟁은 많은 한계 속에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전략적으로 볼 때 실패로 끝났지만 이후 민주화세력, 그리고 학생, 노동자 계층의 반성을 야기하였다. 끝까지, 그리고 죽을 때까지 자신의 역사적 사명을 위해서 투행하는 광주의 민중을 바라보면서 당시까지 낭만주의적이고 소시민적이었던 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