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진적이고 강력한 개혁사상을 가지고 있던 북인계열을 몰락시킨 인조반정 이후 정권다툼은 남인과 서인으로 좁혀졌다. 그중에서도 우암 송시열은 율곡 이이에서 사계 김장생을 거쳐 내려오는 서인의 정통 학맥을 이어온 인물로서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우암이 조선 사회에 끼친 영향을
聖學輯要)이다.
고대에는 덕이 많은 자가 제왕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대가 타락하고 군주의 지위가 세습되면서 그런 사람이 제왕이 된다는 소박한 믿음은 점점 사라졌다. 그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필요한 길은 군주에게 덕을 갖도록 요구하는 길 밖에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군주의 권력을 견제
聖學輯要) 등을 지어 국정 개혁안을 왕에게 제시했다. 1576년에 동인과 서인의 대립이 심화되자 그의 중재 노력이 실패하고 건의한 개혁안마저 묵살되자 낙향하여 본가와 처가를 오가며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저술하고 후학양성에 힘을 썼으며 향약과 사창법을 시행하였다. 45세 때 대사간의 임명으로
1577년(선조 10) 이이(李珥)가 학문을 시작하는 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편찬한 책. 1책. 저술 당시부터 현대에 이르도록 여러 형태로 간행되었다. 해주에서 학도들을 가르친 경험을 바탕으로 기초교육에 대해 정리한 것으로서, 저자가 국왕의 학문을 위해 저술한 《성학집요(聖學輯要)》, 관학(官學) 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