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의 대두이며, 둘째는 예학과 존주론 등으로 표현된 성리학의 경직화 현상이었다. 후자는 특히 전통적인 관념과 질서를 유지하려는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정통의식에 집착하게 되었는데 우암송시열이 이 경향을 대표하는 학자, 정치가라 하겠다.
일반적으로 송시열은 국보 239호로 지정된 초상화
송시열은 이러한 17세기 조선사회의 변화의 한 가운데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일반인들뿐만 아니라 학계에서도 많은 차이를 보인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퇴계나 율곡에 비해서도 조선 정치사상계에 미친 영향이 적지 않았던 송시열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를 생각
사상으로 정착시켰기 때문이고, 퇴계와 율곡이 중요한 이유는 유교 사상을 집대성한 성리학을 이해하여 조선성리학으로 발전시켜 우리나라를 이끌어가는 사상으로 정착시켰기 때문이다. 이처럼 의상의 화엄사상과 율곡의 조선성리학은 우리나라를 이끌어간 양대 사상이었던 것이다. 우암송시열은
Ⅰ. 연암 박지원의 생애
북학파의 거성인 연암 박지원(1737-1805)을 새삼 소개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그는 일찍이 우암송시열 일계의 고루한 학자들이 존명사상에 얽혀서 아무런 실천이 없는 유명무실한 북벌책을 부르짖음에 반하여 북학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또 중국의 산천, 풍토와 문물, 제도에 대
사상이 등장
2> 우암송시열 백호 윤휴와 서계 박세당의 탈주자적 해석 비판
(2) 백호 윤휴
1>한나라 시기의 주석을 참조하여 독자적인 입장
2>『대학』과 『중용』을 중심으로 한 주자의 『사서집주』비판
중용설: 종교성을 회복, 실천적 유학 이론을 전개
3> 우암송시열이 사문난적이라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