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진적이고 강력한 개혁사상을 가지고 있던 북인계열을 몰락시킨 인조반정 이후 정권다툼은 남인과 서인으로 좁혀졌다. 그중에서도 우암 송시열은 율곡 이이에서 사계 김장생을 거쳐 내려오는 서인의 정통 학맥을 이어온 인물로서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우암이 조선 사회에 끼친 영향을
聖學輯要)이다.
고대에는 덕이 많은 자가 제왕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대가 타락하고 군주의 지위가 세습되면서 그런 사람이 제왕이 된다는 소박한 믿음은 점점 사라졌다. 그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필요한 길은 군주에게 덕을 갖도록 요구하는 길 밖에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군주의 권력을 견제
聖學輯要) 등을 지어 국정 개혁안을 왕에게 제시했다. 1576년에 동인과 서인의 대립이 심화되자 그의 중재 노력이 실패하고 건의한 개혁안마저 묵살되자 낙향하여 본가와 처가를 오가며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저술하고 후학양성에 힘을 썼으며 향약과 사창법을 시행하였다. 45세 때 대사간의 임명으로
1577년(선조 10) 이이(李珥)가 학문을 시작하는 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편찬한 책. 1책. 저술 당시부터 현대에 이르도록 여러 형태로 간행되었다. 해주에서 학도들을 가르친 경험을 바탕으로 기초교육에 대해 정리한 것으로서, 저자가 국왕의 학문을 위해 저술한 《성학집요(聖學輯要)》, 관학(官學) 교육
聖學輯要)』에서도 그의 교육철학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의 교육은 한자와 더불어 유교가 들어온 이후 서구의 학문과 교육 방법이 도입되기까지는 유교가 교육의 주된 내용을 이루어 왔다. 이이는 유교적 전통이 우리 민족의 삶을 강하게 지배하던 조선시대에 유교적 교육을 받고 성장했고, 유교를
(愚齋). 시호는 문성(文成). 본관은 덕수.1564년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한 뒤 호조좌랑에 초임된 이래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83년 이조판서가 되어 당쟁의 조정을 위해 진력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망하였다.저서에 《격몽요결(擊蒙要訣)》 《성학집요(聖學輯要)》 《중용토석(中庸吐釋)》 등이 있다.
인물로 부상하였다.
그동안 《동호문답(東湖問答)》, 《만언봉사(萬言封事)》, 《성학집요(聖學輯要)》 등을 지어 국정 전반에 관한 개혁안을 왕에게 제시하였고, 성혼과 '이기사단칠정인심도심설(理氣四端七情人心道心說)'에 대해 논쟁하기도 하였다. 1576년(선조9년) 무렵 동인과 서인의 대립
Ⅰ. 서론
퇴계 이황(退溪 李滉)과 율곡 이이(栗谷 李珥)는 조선의 성리학을 완성한 대표적인 두 인물로서 그들의 후학들과 함께 조선 성리학의 전성기를 주도한다. 퇴계와 율곡은 주자(朱子)성리학이라는 큰 틀을 유지하면서도 근본적인 이해방식에 있어서 차이를 나타내고, 이는 삶을 지배하는 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