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소설가
실학파 중에서도 이용후생(이로운 것을 받아들여 생활을 후하게 하자)을 강조하였던 북학파의 중심인물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장래가 촉망되었고 특히 문학에 뛰어나 당시 문형을 지낸 인물로부터 그 자리를 이을 사람이라는 호평을 받기도 하였다.
당시의 당파싸
같은 양반의 의리를 깊이 생각하시고, 가엾고 딱한 사정을 깊이 헤아리신다면 다시는 이와 같이 물어보실 리가 없으며/ 또 하물며 대신 종을 들여놓고 천인에서 벗어난 줄로 감히 해와 달처럼 밝은 다스림 아래 아뢰오니, 깊이 살피신 후에 특별히 놓아 주시기를 엎드려 비옵니다. 명령을 내려 사또님께
권지훈련원봉사로 처음 관직에 나갔으며, 이어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에 보직되고, 이듬해에 발포수군만호를 거쳐, 1583년 건원보권관 · 훈련원참군을 역임하고, 1586년에는 사복시주부가 되었다. 그러나 무관으로 발을 들여놓은 그의 진로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그는 사복시주부에 이어 조산보만호
권지부정자로 관직에 올랐다. 임진왜란 때에는 좌의정과 병조판서를 겸했고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군무도 총괄했다. 선조가 난을 피해 개성으로 갔을 때 영의정이 되었고, 평양에서는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아 파직 당했다. 서울 수복 후 다시 영의정이 되었고, 훈련도감의 제조를 맡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