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치경관을 답사하며 내가 사는 전주의 곳곳에 숨겨져 있는 장소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으며, 이러한 지식을 바탕으로 왜 일제 침략기에 일본인들이 경기전에 소학교를 세우고 오목대와 이목대를 절단냈으며 심지어 용머리 고개를 절단 내어 길을 내고, 객사의 동익헌을 없애고 길을 냈는지 좀 더 깊이
서론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마주치는 중간에 위치한 반도국가로서 숱한 외침을 당했으며 내외부의 안보 위협이나 정쟁이 잦았던 곳이다. 고조선과 관련한 성과 성곽 형태는 아직 전하는 것이 거의 없으나 중국 만주 지역과 요동지역에 폭 넓게 자리하고 있는 옛 고구려 성터들
조선시대 지방도시의
풍수적 입지분석과 경관유형
-경상도 71개 읍치를 대상으로-
1.자연적 풍수 입지
1)풍수적 입지- 來龍, 藏風, 得水
래룡(來龍)
종산(宗山)에서 내려온 산줄기.
맥 (脈)의 연결성.
1.자연적 풍수 입지
1)풍수적 입지
장풍(藏風)
산세가 혈을 중심으로 잘 감싸주어 혈의 기운을 잘 보호하
읍치의 관아건물을 확장·증측하는 가운데 조성되었다.
정조 13년 7월부터 현륭원 천봉을 앞두고 대대적인 구읍치의 관아와 민가의 철거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화성행궁은 팔달산 기슭 아래로 신읍치를 이치(移置)하기 시작한 지 2개월 뒤인 정조 13년 9월 말에는 벌써 신읍에 조성된 관아 건물은
읍치를 수원의 팔달산 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축성되었다.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
배봉산에서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 화산으로 천봉하고 화산 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 팔달산 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축성되었다. 이 장에서는 역사의현장을찾아서2공통) 교재에서 역사의 현장을 다루는 방식을 참고하여 나의 삶에 특별한 공간을 한두 곳 소개하고 그 의미를 서술하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