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장각
규장각은
(1) 도서의 수집과 편찬 ,
(2) 국왕의 고전 강독 및 국정 자문 ,
(3) 제도개혁 추진 ,
(4) 초계문신/ 과거에 급제한 인물을 재교육 시키는 등 역할을 넓혀나감.
“우문지치(右文之治)”와 “작인지화(作人之化)”를 규장각의 2대 명분으로 내세우고 문화 정치를 표방.
지도표시의 변화
지도 내부에 축척을 나타내는 방안표시가 없음.
도로표시 의 선상에 10리 간격으로 점을 찍음 →읽기에 용이함
도로망,산천의 본지가 훨씬 세밀해짐.
대동여지도의 구성
전체가 227면으로 구성, 여백을 제외한 지도 부분은 213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 장의 목판에 지도 두
Ⅰ. 개요
사법기구로는 일반범죄사건을 다루는 사헌부․형조와 서울의 치안을 담당한 한성부가 있어 이들을 삼법사라 불렀는데, 역시 사법기구의 핵심을 이룬 것은 의금부였다. 의금부는 고려 말 국왕의 근위병과 같은 구실을 하던 순군부가 수차례의 개편을 거쳐 이루어진 국왕 직속의 사법기관
5) 병자호란 당시의 남한산성의 의미 : 남한산성의 돌맹이, 기왓장 하나까지도 나라를 지키기 위한 것 이었다. 남한산성은 우리역사 속에서 우리민족이 당한 침략에 대항한 항전 정신과 독립정신이 깃들어진 장소이다. 병자호란 당시에도 도성과 한강유역을 방어하는 군사적 최적의 요충지로서 비록 항
2.2.2. 『악학궤범 홀기』의 처용무
12월 그믐 하루 전날 오경 초에 악사, 여기, 악공 등이 대궐에 나간다. 이날 나례 때 악사가 여기와 악공을 거느리고 음악을 연주한다.
무릇 구나가 끝난 후에 처용무를 두 번 추는데 처음에는 학과 연화대의 회무 등이 없고 악사가 청, 홍, 황, 흑, 백의 오방처용 및
I. 서론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1861년, 1864년 두 번에 걸쳐 제작되었다. 목판본을 대동지지라고 하며, 초간본과 재간본을 대조해 보면 산맥을 삽입, 지명 새로 추가한 특징이 있다. 이 자료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의 의의 및 상세 내용을 분석, 정리한 A+ 레포트이다.
-”’성곽(城郭)의 나라’라고 할 만큼 많은 성곽이 만들어졌다”『세조실록』
성곽의 분류-산성(山城),행성(行城),읍성(邑城)
-산성:방어를 목적으로 하여 산 정상부의 고위 평탄면을 점유하며 쌓은 성
-행성:일정한 방어선을 유지하면서 여러 개의 성을 연달아 쌓고 성과 성 사이는 지형에 따라
● 그 외 학자들.
그 외 관련된 학자를 들자면 실학자인 반계 유형원이 수원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길목으로 물자가 소통되어야 하는 위치임에도 산이 막혀 그러질 못하여 경제유통의 역할을 하는 자리로 해야한다는 의견을 제시하였고 정약용과 함께 수원화성을 설계하였다. 채제공은 영중추부사로
(2) 화성 행궁에서의 많은 축제 행사로 인한 문화재 훼손우려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방문함에 따라 문화재가 훼손되거나 원활한 행사진행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문화재 보호를 소홀히 하기도 하는데 이는 문화재 보호법에 위배되는 행위이며 화성행궁을 보존하기 위한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 화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