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안 읍성의 입지와 구조 그리고 경관
읍치에 구현된 조선적 권위 상징의 전형을 찾아서
이기봉
목 차
1.머리말
2.낙안군의 읍치이동과 구읍치의
장소적 관성
3.낙안읍성의 조선적 권위 상징화
4.맺는말
머릿말
고려 → 조선
(역성혁명 - 왕조 내에서 세력재편으로 인한 재구조화)
한양은 풍수적 논리
읍치가 위치하고 있는 용복면 화산이 최길지의 명당으로 꼽혀 이곳에 사도세자의 묘를 옮기도록 한 것이다. 이곳을 바로 현륭원이라 하는데 현륭원은 구 수원읍의 관청 바로 뒤에 자리 잡았다. 무덤 앞에는 재실이나 전사청 등 제사와 관련한 여러 건물이 들어서게 되었는데 현륭원의 경우 구 수원읍의
읍치를 수원의 팔달산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축성되었다.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
읍치를 팔달산 동쪽으로 확정
수원유수부로 승격 → 화성이라 부르기 시작
화성 성역공사 실시, 완료
경기 감찰부 소재지 선정
수원면으로 개칭→ 수원읍으로 승격
대한민국
수원시로 승격
경기도청 소재지 수원 이전
분구제 실시
팔달구 개칭
화성 세계문화유산 등록
4개구 행정동(39)
읍치를 수원의 팔달산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축성되었다.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
화성
화성은 조선왕조 제22대 정조대왕이 선왕인 영조의 둘째왕자로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뒤주속에서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의 화산으로 천봉하고 화산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의 팔달산아래 지금의
읍치를 위해 성을 구축하는 것은 반드시 군사적인 목적으로만 축조하였다고 할 수 없는 요소가 있다. 이는 통치를 위한 권위적인 요소와 행정적 편의를 함께 하는 합목적적인 것으로 보인다. 집단의 공동목적이란 개인이 아닌 집단의 공동이익을 위하여 축조하였기 때문에 개인의 사사로운 울타리 구
읍치)인 龍伏面(용복면-현, 화성군 태안읍 송산리) 화산에서 八達山 기슭으로 신읍치를 이전함과 동시에 行宮을 비롯한 여러 官衙의 시설물과 민가. 도로. 교량 등이 營建(영건)되는 등 大都會地로서의 면모를 점차 갖추게 되었다.
더욱이 정조 17년 1월 留守府(유수부) 승격과 더불어 행궁과 여러 관
읍치와 민가들을 수원 팔달산 아래로 집단이전시킴으로써 현재의 수원이 형성되었다. 정조는 부왕인 부친에 대한 효심에서 화성 천도를 계획하고 정조 18년(1794)에 축성공사를 시작, 2년 뒤인 1796년에 준공되었다. 작년 1996년은 화성 축성 200주년을 맞는 해였다.
이 화성은 실학자로 불리우는 유형원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