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리 클린턴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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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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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힐러리 클린턴
출생부터 아칸소 시절
일리노이 주 시카고 출신. 3살 때 시카고 교외의 파크리지 라는 곳으로 이주해 그곳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녔다. 재미있게도 고등학교 때까지의 힐러리는 공화당을 지지하는 보수 성향이었는데 이는 가족과 주변사람들이 모두 공화당 지지자들인 영향이 컸다. 이후 매사추세츠 주 보스턴에 위치한 웰즐리 여자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한다. 대학 초기에 잠시 공화당 청년조직에 가입하기도 했지만 베트남 전쟁과 흑인 민권운동을 둘러싸고 청년조직의 다른 이들과 다른 생각을 가진 탓에 비록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업무 보조역을 하긴 했지만 심적으로는 민주당 쪽으로 점점 기울어져가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예일 대학교 법학대학원에 진학했는데 이곳에서 법학과 학생이던 빌 클린턴을 만나게 된다. 빌이 대학 졸업 후 컬럼비아 변호사 시험에서 낙방하고 고향인 아칸소 주의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자 아칸소로 빌을 따라서 건너가게 된다. 1975년, 빌의 청혼에 두 사람은 결혼했는데 이때 힐러리는 자신의 처녀 때 성인 로댐을 계속 유지했기에 풀 네임이 성이 로댐 클린턴이 되었다. 빌은 이미 약관의 나이에 정계진출을 시도했는데 1974년 하원의원 선거에서는 낙선했지만 1976년 리틀록의 지방판사에 선출되어서 빌과 힐러리는 리틀록으로 이주했고 힐러리는 로즈 로펌에서 일하게 된다. 어린이 보호활동을 전개해서 아칸소 주의 어린이 보호협회 회장을 맡기도 했고 1978년 빌이 아칸소 주지사에 당선되자 농촌지역건강지원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아 아칸소주의 가난한 지역들에 의료시설을 확충하는 역할을 했다. 이 때의 경험은 그녀가 빌 클린턴 행정부 초창기 때 의료보험 개혁 작업을 주도하는 데로 연결된다.
1980년, 빌은 아칸소 주지사 재선에 실패했지만 2년 뒤에 다시 재기에 성공했다. 힐러리는 남편의 선거운동을 적극 지원해 유권자들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영부인 활동과 정계진출
1992년, 빌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힐러리는 영부인이 되었다. 기존의 영부인들이 조용히 대통령을 내조하는 수준이었던 것과는 달리 힐러리는 적극적으로 정책에 관여했는데 보통 백악관 동관(East Wing)에 영부인 집무실을 두는 관례를 깨고 백악관 서관(웨스트윙)에 집무실을 둘 정도였다. 1993년, 빌 클린턴은 힐러리에게 국민의료보험 개혁을 맡겼다. 이때 힐러리는 고용인이 피고용인의 의료보험을 보장하는 개혁안을 제시했지만 자유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미국의 특성에 민간의료보험 회사들의 엄청난 로비가 더해져 의회에서 개혁안은 부결되었고 힐러리는 엄청난 비난을 받아야 했고 힐러리에 대한 지지율은 40%대 이하로 추락했다. 여하간 이때 나온 유명한 농담이 힐러리의 옛 애인과 만난 클린턴 부부 이야기. 이 예전 애인이던 양반은 주유소 사장님이 됐는데, 이걸 본 빌 클린턴이 힐러리 에게 "(대통령감 이었던) 날 만난 걸 영광으로 알라"는 식으로 말하자 힐러리가 "아니, (계속 내가 저 주유소 주인을 만났다면) 저 양반이 대통령이 되었겠지"라고 일침 했다는 것.
아이러니컬하게도 힐러리를 다시 끌어올린 것은 남편 빌의 스캔들 파문이었다. 초기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불륜설이 돌았을 때 힐러리는 이를 보수 측의 음모로 규정했지만 스캔들이 실로 드러났음에도 그녀는 남편과의 결혼을 유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물론 2003년에 출간된 그녀의 자서전에는 이 양반이랑 계속 살아야 해? 라고 고민했다고 솔직히 털어놨지만. 이 때문에 그녀가 정치적 목적에서 이혼을 하지 않은 게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어쨌든 남편을 감싸는 모습에 그녀에 대한 동정여론이 확산되면서 그녀에 대한 지지율은 70%대를 넘게 되었고 이는 결과적으로 그녀가 정계로 진출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다만 훗날 스캔들이 터졌을 당시 남편이 밉지 않았느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는 "(클린턴의)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었다" 고 대답하기도 했다. 2014년에는 르윈스키를 가리켜 나르시시즘에 빠진 루니툰이 라고 비난하기도. 1998년, 뉴욕 상원의원 자리가 비게 되자 민주당 인사들의 권유를 받아 상원 선거에 출마했다. 당초 그녀의 강력한 경쟁상대로는 뉴욕 시장이던 루디 줄리아니가 거론되었는데, 아마 줄리아니와 붙게 되었다면 승패를 장담하기 힘들었겠지만 줄리아니가 전립선암으로 출마를 포기하면서 그녀는 55%의 득표율로 상원의원에 오르게 된다. 이후 그녀는 미국에 여성 대통령이 나온다면 가장 가능성이 높은 정치인으로 주목받게 된다. 상원위원으로 활동할 때 국방위원회 소속으로 그녀는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에 찬성표를 던졌는데 이는 후에 대선과정에서 논란거리가 되기도 했다.
2008년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2007년 이미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민주당 경선에 뛰어들었지만...민주당 대선 경선의 시작이라고 할수 있는 아이오와 코커스에서 뉴비 버락 후세인 오바마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했다. 아이오와 코커스에서 승기를 잡은 후보가 대선후보가 되는 미국의 특성상 힐러리로서는 충격적인 결과. 물론 아이오와 법칙이 꼭 필승도 아니긴 했지만 경선 흥행을 위해 힐러리도 전략적으로 띄워주던 오바마가 강력한 경쟁자로 부상한 것이다. 두 번째로 열린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에서는 승리를 거두면서 반전의 계기가 되나 싶었는데... 이게 민주당 역사상 가장 치열한 경선의 서막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뚜껑을 열기 전에는 힐러리의 대세가 점쳐졌고 그렇게 흘러가나 싶었지만 예상 밖의 결과에 힐러리도 상당히 당황했던 듯하다. 뉴햄프셔 프라이머리 이후 흑인 배우이자 시인인 마야 안젤루가 힐러리 지지를 선언하면서 흑인 표에 줄 영향에 기대를 모으게 되었다. 물론 오바마는 오프라 윈프리의 지지 선언을 얻어내서 별 실효는 없었지만. 2008년 1월과 2월에 각각 열린 미시간 프라이머리와 플로리다 프라이머리[1]에서는 힐러리가 승리를 거두었지만 하필이면 두 주가 민주당 전국위원회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규정을 어긴 채 프라이머리를 시행하는 바람에 민주당 전국위원회는 미시간과 플로리다의 프라이머리를 무효로 선언해 버렸다. 힐러리는 이에 반발해 미시간과 플로리다의 프라이머리를 다시 실시할 것을 주장한 반면 오바마는 재경선 실시에 미적대는 반응을 보였다. 양측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가운데 2008년 2월 5일, 22개주에서 동시에 경선을 치루는 슈퍼 화요일에서 승부가 결판날지 관심이 집중되었다. 보통 슈퍼 화요일에서 승리를 거둔 후보가 대선 후보로 확정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 오바마는 13개주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힐러리는 8개주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두 후보의 득표율은 초박빙이었고 어느 쪽도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해 승부는 그 뒤로도 계속 이어졌다. 2008년 3월 4일 텍사스, 오하이오, 로드 아일랜드, 버몬트의 4개주에서 경선이 치뤄지는 미니 슈퍼 화요일에서는 힐러리가 텍사스, 오하이오, 로드아일랜드 3개주를 석권해 승부는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펜실베이니아 주 경선에서 압도적으로 이기지 못하자 민주당 내에서는 이제 할 만큼 했으니 그만 사퇴하라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힐러리는 끝까지 가겠다 라면서 경선 완주를 주장했다. 결국 사상 유례 없는 혈전이 된 경선은 반년 만인 2008년 6월에야 마무리 되었고, 힐러리는 6월 7일 뉴욕에서 경선 패배를 인정하고 오바마를 적극 돕겠다고 선언해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국무장과 임명과 그 이후
경선 패배 이후 민주당 내에서는 오바마 대통령-힐러리 부통령의 소위 드림티켓론이 논의되었지만 힐러리는 러닝메이트를 거절했다. 거절한 사유에는 전직 대통령의 부인이 부통령이 될 수 있느냐에 대한 논란과 힐러리가 경선 과정에서 진 거액의 빚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2009년, 대통령에 당선된 오바마는 힐러리 에게 국무장관 직을 제안했고 힐러리는 고심 끝에 이를 수락했다. 다만, 미국법상 국무장관이 되려면 부채 문제를 해결해야 했는데 힐러리는 경선 때 진 거액의 빚을 아직도 해결 못한 상황이었다. 이 문제는 드라마 《어글리 베티》의 주연배우이자 힐러리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아메리카 페레라가 열성적으로 기부금 모금에 나서준 덕에 해결되어서 힐러리는 국무장관에 취임할 수 있게 되었다. 2010년 후반, 차기 대선에 나설 거냐는 질문에 국무장관직을 마지막 공직이라고 생각한다는 답변을 했다. 하지만 2016년 대선에 나설 수도 있을 것이라는 전망도 만만치 않다. Hillary Clinton 2016! 페이스북 페이지(물론 비공식)도 있다. 일단 2012년 대선에서 오바마가 클린턴 전 대통령의 지원사격을 받았기 때문에 재선될 경우 어떻게든 클린턴 전 대통령을 배려할 수밖에 없고 이미 대통령을 지낸 클린턴 전 대통령을 배려한다면 그 배려의 결과는 힐러리의 2016년 출마 지지로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 다만 이 문제는 아직 먼 이야기이기 때문에 좀 더 두고 봐야 할 듯하다. 다만 문제는 힐러리의 건강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근래에 힐러리는 바이러스성 위 질환으로 쓰러지는 과정에서 뇌진탕까지 겹쳐서 2주 정도 요양한 상황이었는데 다시 혈전 증세로 입원했다고 한다. 일단 오바마 2기 행정부가 출범하고 나서 존 케리가 힐러리의 뒤를 이어 국무장관이 되었으므로 휴식기간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힐러리의 오랜 참모그룹들이 2008년 경선이후 와해되어 힐러리가 대선에 재도전한다 해도 문제가 생길 것이라는 지적이 있다. 힐러리의 참모들은 힐러리의 경선패배에 큰 내상을 입었고 힐러리가 오바마의 국무장관 제의를 수락하자 힐러리 에게 환멸을 느끼고 뿔뿔히 흩어졌다는 것. 힐러리가 대선에 재도전 하려면 우선 와해된 참모그룹부터 복구해야 하는 과제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2013년 6월 10일에 트위터를 개설했다. 사실 계정은 이전부터 있었지만 팔로 기능을 차단했다가 그것을 오픈한 것. 하루만에 26만 명이 팔로 할 정도로 인기를 모으고 있다. 이런 행보는 힐러리가 차기 대권 출마의 포석을 놓는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을 낳고 있다. 6월 13일에는 클린턴 글로벌 이니셔티브의 행사에 참석해 자신이 국무장관 퇴임 후 세 가지 이슈에 관심을 집중할 것이며, 그것은 유아발달, 경제성장, 여성의 정치참여라고 밝혔다. 세간에는 여성의 정치참여에 방점이 찍힌 것이 아니냐는 분석과 함께 대권 행보를 시작하면서 자신의 국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