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치외교사]조선의 쇄국-개항사

 1  [한국정치외교사]조선의 쇄국-개항사-1
 2  [한국정치외교사]조선의 쇄국-개항사-2
 3  [한국정치외교사]조선의 쇄국-개항사-3
 4  [한국정치외교사]조선의 쇄국-개항사-4
 5  [한국정치외교사]조선의 쇄국-개항사-5
 6  [한국정치외교사]조선의 쇄국-개항사-6
 7  [한국정치외교사]조선의 쇄국-개항사-7
 8  [한국정치외교사]조선의 쇄국-개항사-8
 9  [한국정치외교사]조선의 쇄국-개항사-9
 10  [한국정치외교사]조선의 쇄국-개항사-10
 11  [한국정치외교사]조선의 쇄국-개항사-11
 12  [한국정치외교사]조선의 쇄국-개항사-12
 13  [한국정치외교사]조선의 쇄국-개항사-13
 14  [한국정치외교사]조선의 쇄국-개항사-14
 15  [한국정치외교사]조선의 쇄국-개항사-15
 16  [한국정치외교사]조선의 쇄국-개항사-16
 17  [한국정치외교사]조선의 쇄국-개항사-17
 18  [한국정치외교사]조선의 쇄국-개항사-18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한국정치외교사]조선의 쇄국-개항사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급변하는 세계정세와 동아시아

1) 서구 열강의 동아시아 침략과 중화질서의 동요

2) 개항 이후 청ㆍ일의 대응 : 양무운동과 메이지유신

II. 본론

1. 대원군의 등장과 쇄국정책

1) 대원군의 내정개혁

2) 병인양요ㆍ신미양요

2. 조일수호조규 체결과 개항

1) 고종의 친정과 대외정책의 변화

2) 조일수호조규 체결과 개항

3) 서구 열강과의 수교와 양절체제

3. 개화파와 갑신정변

1) 개화파의 형성

2) 초기 개화정책의 추진

3) 임오군란

4) 갑신정변

III. 결론 및 토론

1. 쇄국이냐 개국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2. 역사적 사실이 보여주는 결과

3. 쇄국과 개국 어떠한 선택이 올바른 선택이었을까?

4. 질문 및 토론 내용

● 참고자료


본문내용
3) 임오군란
(1) 임오군란의 발발

임오군란은 초기 개화시책에서 소외되어 생활의 위협을 받게 된 서울의 하급군인들과 빈민층이 일으킨 생존권 투쟁의 양상으로 일어났다.
1881년 별기군이 창설되고 군제개혁이 단행되자, 5군영 소속의 상당수 군인들이 실직하고 2군영에 편입된 군인들 또한 별기군에 비해 열악한 처우를 받게 되었다. 게다가 구식군인들의 급료가 13개월이나 밀리면서 이들의 불만은 절정에 달했다. 이는 개항 후 다량의 미곡이 일본으로 유출되어 국가보유 미곡이 고갈된 것이 주된 원인이었으나, 구식 군인들은 그 원인을 민씨 척족의 부정부패로 인식하여 급료 담당 관리인 선혜청 당상 민겸호와 전 당상 김보현에게 깊은 원한을 갖게 되었다.
이처럼 구식 군인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던 1882년 6월 초, 전라도 세곡이 서울에 말단 관리의 착복으로, 급료로 지급된 쌀에는 겨와 모레가 섞여 있었고 양도 턱없이 모자랐다. 이로 인해 구식군인들과 말단 관리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다. 그런데 이를 보고 받은 민겸호는 김춘영, 유복만 등 4명을 주동자로 체포하여 고문을 가하고는 이중 2명을 처형하려 했다. 이에 구 훈련도감 군인들은 6월 9일 동별영에 집결하여 자신들의 직속상관인 무위대장 이경하에게 동료들의 구명을 호소했다. 하지만 실권이 없던 이경하는 민겸호를 통한 직접 해결을 유도했고, 이에 구식군인들은 민겸호의 집으로 몰려갔다. 그런데 이곳에서 도봉소 고직을 만나 다투던 중 민겸호의 집이 파괴되었다.
상황이 이처럼 악화되자 구식군인들은 대원군을 찾아가 그 대책을 진정했고, 권력을 잃고 의기소침해 있던 대원군은 이를 이용하여 재집권의 기회로 삼고자 했다. 대원군의 묵인 하에 구식군인들의 행동은 더욱 대담해졌다. 도별영의 무기고를 습격하고, 포도청에 구금되어있던 김춘영 등을 탈옥시켰으며, 일본공사관마저 습격했다. 또 민씨 척족정권의 최고 권력자인 민비를 겨냥하여 창덕궁으로 몰려가 궐내를 수색했다. 이 과정에서 별기군 교관 호리모토를 비롯한 외무성 순사 등 일본인들과 영돈녕부사 이최응과 민겸호, 김보현 등이 살해당했고, 일본공사관원들은 공사관 건물을 자진 방화한 뒤 125일 일본으로 철수했다. 민비는 무예별감 홍재희의 도움으로 궁궐을 탈출, 충주로 피난하여 화를 모면할 수 있었다.
결국 고종은 사태 수습을 위해 대원군의 입궐을 청하여 “지금부터 대소 공무는 모두 대원군 앞에서 품결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로써 재차 권력을 장악한 대원군은 고종에게 자책교지를 반포하게 하여 구식군인들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한편, 민비의 유고 상태를 기정사실화 하기 위해 민비의 국상을 반포했다. 이어 통리기무아문과 별기군을 혁파하고 삼군부와 5군영을 복구시킴으로써 종전의 개화정책을 백지화시켰으며, 민씨 척족세력을 제거하고 자신의 세력을 확보하기 위한 인사조치를 단행했다.

(2) 외세 개입과 청의 대 조선정책의 변화

임오군란을 계기로 일본과 청은 각각 군대를 파견하여 자신들의 영향력을 극대화 하기 위해 각축을 벌였다. 6월 15일 나가사키에 도착한 하나부사 요시모토 공사의 보고를 통해 군란 소식을 알게 된 일본정부는 조선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며 하나부사를 전권위원으로 하여 군함과 병력을 조선에 파견했다. 6월 29일 제물포에 도착한 하나부사는 7월 7일 고종을 알현한 자리에서 7개항의 요구사항을 제출하고 3일 내로 회답할 것을 통고했다.
한편 6월 18일 주일공사 리수창의 통지를 통해 군란 소식을 접한 청 또한 재빠르게 군대를 파견했다. 7월 7일 남양만 마산포에 도착한 청군은 서울로 들어와 13일 대원군을 전격
참고문헌
연갑수, 2001, 대원군집권기 부국강병정책연구, 서울대출판부
김용구, 2001, 세계관 충돌과 한말 외교사 1866-1882, 문학과 지성사
김문형, 2002, 한국을 둘러싼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 지식산업사
이광린, 1997, 개화당 연구, 일조각
손형부, 1997, 박규수의 개화사상연구, 일조각
이완재, 1998, 한국근대 초기개화사상의 연구, 한양대학교 출판부
신용하, 2000, 초기개화사상과 갑신정변 연구, 지식산업사
김용구, 2004,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도서출판 원
김기협, 2008, 밖에서 본 한국사, 돌베개
국사 교과서, 국사편찬위원회
세계사 교과서, 지학사
EBS 다큐프라임, 2010, 경술국치 100년 특별기획 ‘개항과 전쟁’,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 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