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 운동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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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청교도 운동 교회사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16~17세기 주로 칼빈주의의 흐름을 이어받은 자들로 “퓨리탄”이라고도 한다. “퓨리탄”(청교도)이라는 이들의 명칭은 교회가 로마 카톨릭적 제도, 의식에서 벗어나 성경적 종교로 돌아가도록 “청소”해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에서 비롯되었다.(당시 많은 청교도들은 성경에 근거한 교리, 조직, 체제를 주장하여 비성서적인 감독 제도의 폐지를 주장 제네바적 시각에서 신약성서를 본 일부 청교도들은 장로들에 의해 교회 내 효과적인 권징이 유지되고, 교역자들은 회중의 동의에 의해 직분을 맡는 것이며, 성경 내의 주교와 장로와 집사는 동의어로 쓰였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는 본질적인 영적 동등성을 지닌다고 주장한 칼빈의 말을 근거로 하여 감독제에 반대하였다.(윌리스턴 워커. 기독교회사.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1. p606)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엄격한 도덕, 주일의 신성화 엄수, 향락의 제한을 주창하였으며, 제임스 1세, 찰스 1세 때에 비국교도로서 심한 박해를 받고 네덜란드와 기타 지역으로 피해 가기도 했는데, 그 중에서도 신대륙 플리머스에 식민지를 개척한 메이플라워호 이야기가 유명하다. 청교도는 점차로 의회에서 유력한 세력으로 등장했으며, 1642년에 일어난 청교도혁명의 주체가 되었다. 이들은 하나의 집단으로 조직되어 있거나, 모든 문제에 의견 일치를 보는 집단은 아니어서 이후 분열을 거듭하였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과 존 밀턴의 ‘실낙원’이 당시의 대표적 문학으로 알려져 있다. (- 두산 대백과 엔싸이버 참조.)
2. 청교도 운동의 역사적 배경
제임스 1세
1603년 엘리자베스 여왕에 이어 잉글랜드의 왕위를 계승한 스코틀랜드의 국왕 제임스는 양국의 많은 반대자들로 인해 통치의 어려움에 겪었다. 특히 스코틀랜드와 같은 종교 개혁을 이루길 희망하던 잉글랜드 내의 프로테스탄트들이 골칫거리였는데, 이들은 잉글랜드 교회 속의 전통적 요소들 청교도들은 당시 화려한 잉글랜드 교회의 예배 의식에 반대하였고, 주일에 종교 의식과 자선행위만 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당시 영국 국교는 신학적 성격적 배경을 근거로 한 예식의 변화에 반하여 예배 의식의 아름다움을 고수하길 원했다.(곤잘레스. 현대교회사. 은성. 1995. p41)
특히 기본적인 권위인 성서에 대한 교회의 권위 있는 전통의 해석자라는 주장에 반대했고, 모든 신자의 제사장직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대중에게 권능을 지닌 영적 신분으로 보이게끔 하는 규정된 성직 의상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육체적으로 현존하는 그리스도 숭배를 반대하여 성만찬 시 무릎 꿇는 것을 거절했다. 덧붙여 혼인을 성례로 평가하는 것에 반대하여 결혼식에서의 반지 사용을 거부했고, 세례 시 십자가 표시를 하는 것을 미신적이라고 생각하였다.(윌리스턴 워커. 기독교회사.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1. p605)
(십자가의 사용, 특정한 사제들의 예복, 제단에서 행하는 성찬식 등)을 거부하였고, 성경을 바탕으로 한 경건한 생활의 확립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감독제도의 강화를 통해 강력한 왕실주의를 꿈꾸던 제임스는 햄프톤 코트(Hampton Court) 회의 이 회의로 인해 청교도들이 바랐던 중요한 변화는 아무 것도 실현되지 않았으나, 유일한 결과물로는 1611년에 출판된 흠정역(King James Version)을 들 수 있다.(곤잘레스. 현대교회사. 은성. 1995. p45)
에서 장로회 제도를 거부하였다. 이후 1606년 보다 노골적으로 반청교도적인 일련의 교회법들이 교회 당국에 의해 승인되는 등 하원과 보수적 감독들 사이의 갈등의 골이 더욱 깊어져갔다. 1618년 제임스 1세의 「오락서」(Book of Sports) 옛날 유행하던 오락과 댄스로 일요일을 보내라고 추천한 책
발행은 청교도들의 큰 분노를 샀으며, 이후 1621년 총회를 협박하고, 의회를 동원하여 성만찬에서 무릎 꿇을 것, 주교의 손에 의한 견신례, 큰 교회 축일의 준수, 사적인 성만찬, 사적인 세례 등의 조항을 강조했던 것, 독일 개신교에 대한 효과적 지원 실패, 태자와 스페인 공주의 혼인 계획 등 제임스 1세의 실정으로 인하여 청교도주의는 하원과 더욱 정치적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었다.
찰스 1세
강력한 중앙 집권을 원하던 찰스 1세는 프랑스 루이 13세 누이와의 결혼으로 청교도들의 불신을 샀고, 막대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 수차례 의회를 소집했으나, 때마다 일어난 하원과의 갈등으로 의회를 해산시켰다. 이후 재정의 확충을 위해 의회 동의 없이 자의적으로 세금을 부과하고, 강제 세금 징수 및 납세 거부자를 투옥하는 것을 비롯하여, 상류층 중심의 번영을 택했던 그의 통치로 인하여 국민 대다수들은 왕과 주교들을 비난하게 되었다. 결국 당시 많은 청교도들은 그들이 성경을 따라 믿는 바대로 선포하고 조직할 수 있는 자유를 찾아 플리머스 개척 이후 또 다시 대서양을 건너기 시작하였다. 1628년 메사추세츠로 이주한 자들을 비롯하여 이후 1640년까지 보스턴, 도르체스터, 코네티컷, 하트포드, 뉴헤이번, 뉴잉글랜드 등지로 약 2만 여명이 대서양을 건넜다.(윌리스턴 워커. 기독교회사.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1. p615-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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