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민족 조선족朝鮮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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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소수민족 조선족朝鮮族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중국 소수민족의 하나인 조선족은 1990년 현재 총 1,920,579명으로, 주로 길림성(1,181,964명) 흑룡강성(452,398명) 요녕성(230,378명)에 분포되어 있으며, 그 나머지는 내몽고자치구와 북경 천진 상해 항주 성도 제남(濟南) 서안 무한(武漢) 등지의 대도시에 흩어져 살고 있다. 그 중 전중국 조선족의 40% 이상이 집중되어 있는 길림성 연변(延邊) 조선족자치주(朝鮮族自治州)는 중국 내 조선족의 최대 거주 지역으로 약 80만명의 조선족이 살고 있다.
조선족은 대부분 알타이어계에 속하는 한국어와 한글을 사용하고 있으며, 다른 지역에 흩어져 사는 극소수의 조선족들은 중국어와 중국문자를 사용하기도 한다.
중국의 조선족은 300여년 전에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의 한반도로부터 몇 차례의 대규모 이주를 거쳐 중국의 동북지구에 정착한 후에 서서히 형성된 하나의 새로운 민족 공동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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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6년 만족 조상 노이합적(努爾哈赤: 누르하치)이 여진의 각 부족을 통일한 후 후금(後金)을 세우고 그 세력을 요동(遼東)과 요서(遼西) 등지로 확장해나갔다. 1636년 그의 아들 황태극(皇太極)은 국명을 청(淸)으로 고치고 후환을 없애기 위하여 명왕조와 우호관계를 맺고 있던 조선을 침공하였다. 무력에 못이긴 조선의 국왕은 청나라에 화의를 청하여 강화도에서 동맹을 맺고, 압록강 두만강을 경계로 양국은 각자 자기의 영토를 지키면서, 영원히 우호관계를 유지할 것을 강조하였다.
1604년 청나라 군대가 중원으로 쳐들어가자 이때 여진의 각 부락도 그들을 따라서 함께 남하하여 여진인들이 살던 지역은 텅 비게 되었다. 통일 초기에 청나라 통치 계층은 이 지역의 개발을 돌아볼 틈이 없었지만, 충분한 논의를 거친 다음 1677년에 강희제(康熙帝)는 명령을 내려 백두산과 압록강 두만강 이북의 수천리 지역을 금지구역으로 정하고, 이 지역 안에서 작물 재배, 인삼 진주 채취, 벌목 수령 등을 엄격히 금지시켰으며, 많은 금산(禁山)에 황제의 사냥터를 설치하여 다른 민족의 이주 정착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뜻대로 되지 않고 조선왕조의 학정에 시달린 조선의 빈곤한 농민들은 사방을 떠돌아다니다가 그들 중의 일부는 생존을 위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금지구역 안으로 몰래 들어와 정착하였다. 이러한 난민들의 끊임없는 유입은 청나라 정부와 조선 사이의 외교 분쟁을 유발시켰으며, 국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양국은 협의를 거쳐 공동으로 몇 가지 조치를 취하였다. 1712년 5월 양국은 백두산에 정계비를 세웠다. 청나라 정부는 국경 지대에 성벽을 쌓고 초소와 검문소를 설치하였으며, 봄 가을에 국경 지대를 순찰하여 법을 어기고 들어와 몰래 경작하는 자가 발각되면 집과 전답을 몰수하여 없애고 국경 밖으로 추방하였다. 조선정부에서도 국경 지대에 군대를 배치하여 국경을 봉쇄하고 그곳을 넘어가는 자에 대해서는 극형으로 다스렸다.
조선의 빈곤한 농민들이 금지구역에 몰래 들어와 정착하는 것을 양국 정부 모두 엄격한 방법으로 통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잠입은 여전히 끊이지 않았다. 처음에 금지구역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대부분 무역상들이었다. 청왕조 초기에 압록강 상류의 평안도와 함경도는 토지가 척박한 데다가 잇따른 자연재해로 흉년이 계속되어 생활필수품도 매우 부족하였다. 이에 궁지에 몰린 조선의 농민들은 생존을 위하여 압록강 상류를 몰래 건너 중국 동북의 장백(長白) 임강(臨江) 집안(輯安) 및 외남북로(外南北路) 일대로 들어왔다. 같은 시기에 두만강 남쪽에 살던 조선 빈민들도 무산(茂山) 회령(會寧) 종성(鍾城) 등지에서 두만강 상류를 건너 중국으로 들어왔다. 이들은 처음에는 아침에 들어와 경작을 하고 저녁에 돌아갔으나, 뒤에는 매년 청명절을 전후하여 농기구와 종자를 가지고 들어왔다가 가을에 작물을 수확하여 그것을 가지고 돌아갔으며, 마지막에는 아예 전가족이 이주하여 오랫동안 집을 짓고 살면서 농사를 지었다. 이에 대하여 청정부에서는 그들을 추방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였지만 결국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특히 1845년(道光 25년) 이후 양국 정부의 통제가 다소 느슨해진 틈을 타서 국경을 넘어와 정착한 조선 빈민들의 수는 급격히 증가하였다.
1840년의 아편전쟁을 기점으로 중국은 점점 반식민지 반봉건 사회로 전락하였다. ≪중러애휘조약(中俄愛琿條約)≫ ≪북경조약≫ 등의 불평등조약의 체결로 동북 지역은 세계 자본주의 열강의 상품 판매 시장이자 원료 약탈지가 되기 시작하였다. 이와 동시에 조선왕조도 러시아 미국 영국 등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으로 국력이 쇠약지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사회적으로 매우 혼란하였다. 1860년부터 1870년에 이르는 10년간 조선의 북부 지역에는 수해와 한해가 끊이지 않고 발생하여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죽음의 기로에 선 조선의 이재민들은 생존을 위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국경을 넘어 중국의 동북 지역으로 들어왔다. 기록에 의하면 1870년을 전후하여 집안현(輯安縣, 지금의 集安市)으로 이주해 온 조선 이재민의 수는 무려 1000호를 넘어섰다. 그리하여 임강(臨江) 집안과 혼강(渾江) 유역에는 모두 조선의 이재민들로 가득차게 되었다.
청왕조와 조선 정부에서는 국경 봉쇄 조치를 취하였지만 끊임없이 들어오는 조선 이재민들을 더 이상 막을 방법이 없었으며, 청왕조의 지방 관리들도 어쩔 수 없어 그들의 정착 생활을 묵인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극도로 피폐해진 청나라 정부에서도 고갈된 재정 상황을 만회하기 위하여 많은 논란을 거친 끝에 광서(光緖) 원년(1875년)에 이르러 봉천성(奉天省, 지금의 요녕성과 길림성 동남부)의 봉쇄령을 해제하였다. 그 이듬해는 이 지역에 봉황직례청(鳳凰直隷廳)을 설치하고 그 아래에 안동현(安東縣, 지금의 丹東市)을 두었다. 1877년에는 관전현(寬甸縣) 회인현(懷仁縣, 지금의 桓仁)과 도씨현(道氏縣) 등을 증설하여, 안동현과 관전현을 변외남로(邊外南路)로 삼고 봉황직례청에 예속시켰으며, 회인현과 통화현(通化縣)을 변외북로(邊外北路)로 삼고 흥경청(興京廳)에 예속시켰다. 이와 동시에 무민국(撫民局)을 설치하여 백성들의 개간을 지원하였다. 청왕조는 봉쇄령을 해제하고 변방 이민정책을 시행함으로써 조선의 이재민들이 중국의 동북 경내로 이주하는 데 합법적인 조건을 마련해주었다. 1883년 3월 청나라 정부에서는 동쪽의 무역로 활성화라는 측면에서 조선 정부와 ≪봉천동변민교역장정(奉天東邊民交易章程≫을 체결하였다. 객관적으로 말하면 이 장정의 체결은 양국의 국경 무역을 촉진시켰을 뿐만 아니라 조선인들의 동북 이주로를 더욱 확장시켰다. ≪조선족간사(朝鮮族簡史)≫의 통계에 의하면, 1897년 통화 회인 관전 흥경(興京, 지금의 요녕 新賓縣) 등지로 이주한 조선인들은 8722호, 37000여명으로 모두 28개의 면(面, 지금의 鄕級 행정단위) 단위에 소속되었다. 1903년 봉천성에서는 압록강 북쪽으로 이주한 조선인들의 촌(村)과 영(營)을 향(鄕)과 갑(甲)으로 개편하고 향약제(鄕約制)를 시행하였다. 시간이 갈수록 중국으로 이주해 오는 조선인들의 수는 더욱 증가하였다. 1911년에 이르러 변외북로(邊外北路)의 장백 임강 집안 등지에 정착한 조선인들의 수는 12100여호, 52100여명이었고, 변외남로(邊外南路)의 안동 봉성(鳳城) 관전 등지에 정착한 조선인들의 수는 1490여호, 6850여명이었다.
흥경은 조선인들이 비교적 일찍 이주해 온 지역의 하나이다. 그들은 대부분 집안 회인과 통화 등지에서 이주해 왔으며, 그들 중의 일부는 다시 무순(撫順) 본계(本溪) 청원(淸源) 등지로 퍼져나가 정착하였다. 동북의 대도시 봉천(지금의 沈陽) 지역 내의 조선인들은 주로 1906년 이전에 한반도 북부에서 이주해 왔다. 1910년 일본이 조선을 합병한 후에 일제의 학정에 시달린 농민들과 애국 독립투사들이 다시 봉천 일대로 많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