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는 삼천궁녀 때문에 멸망했는가

 1  백제는 삼천궁녀 때문에 멸망했는가-1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백제는 삼천궁녀 때문에 멸망했는가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1.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백제 멸망 원인: 백제의 멸망은 사치와 향락에 빠진 의자왕의 실정을 극 대화하여 멸망의 주요인으로 삼은 것이다. 전통시대 역사가들은 어떤 왕조이든 간에 그 왕조의 멸망 원인을 항상 그 마지막 왕의 폭정에서 찾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전 왕조에 대한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들이 다음 왕조의 역사가들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2.《삼국사가≫에 기록된 의자왕의 상반된 기록
-《삼국사기≫의자왕 16년조 “봄 3월에 왕이 궁녀들을 데리고 음란과 향락에 빠져 서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으므로 좌평 성충이 극력 말렸더니 왕이 성을 내며 그를 옥에 가두어 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의자왕은 충신의 충언도 듣지 않는 등 국정 을 도외시한 채 음란과 향락에 빠져 지내는 인물로 묘사, 이런 실정으로 백제가 멸망하였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삼국사기≫의자왕조 “의자왕은 무왕의 맏아들이다. 그는 용감하고 대담하여 결 단성이 있었다. 무왕이 왕위에 있은 지 33년에 태자가 되었다. 부모를 효성으로 섬기고 형제간 에 우애가 있어서 당시 해동증자라고 불렀다.”→당시 백제인들은 의자왕을 줄국의 증자와 같은 동방의 성인이라 하여 ‘해동증자’로 추앙하였다는 것이다.
3. 당과 신라의 백제 공격 협의
-김춘추는 진덕왕 2년(648)에 아들 문왕(文王)과 함께 당에 들어라 나당간에 백제 정복계획을 수립→《삼국사기≫진덕왕 2년조 “(당 태종이) 조용히 불러 황금과 비단을 더욱 후 하게 주면서 묻기를, ‘그대는 무슨 소원이 있는가’ 하였다. (김)춘추는 무릎을 꿇고 아뢰기를. ‘저의 나라가 멀리 바다 한구석에 있으면서 대국을 섬긴 지가 여러 해가 되었는데 백제는 포악 하고도 교활하여 함부로 자주 침범을 하였으며 더구나 지난해에는 대부대의 군사로 깊이 침입 하여 수십 성을 합락시킴으로써 입조(入朝)할 길조차 막았습니다. 만약 페하께서 천병(天兵)으 로써 흉악한 무리들을 잘라 없애지 아니한다면 저의 지방 백성들은 남김없이 사로잡히게 될 것 이오니 험한 육로와 수로를 거쳐 조공할 일도 다시 바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태종이 깊 이 동감하고 출사(出師)를 허락하였다.”→김춘추와 당태종은 백제뿐만 아니라 고구려까지 정벌 하기로 하는 동시에 전후(戰後) 평양이남과 백제 지역을 신라가 차지한다는 영토분할 약정까지 도 합의
4. 백제의 멸망의 결정적인 원인은 당나라의 공격
-《삼국사기≫ “백제가 말기에 와서 행동이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 많았으며 또한 대대로 신라와 원수를 맺어 고구려와 함께 화친을 계속함으로써 신라를 침공하고 유리한 조건 과 적당한 기회만 있으면 신라의 중요한 성과 큰 진들을 떼어 가고 빼앗아 가기를 그치지 않았 으나 소위 인자(仁者)와 친하고 이웃을 잘 사귀는 것이 나라의 보배라는 것과 다르다. 이에 대 하여 당나라 천자가 두 번 조서를 내려 백제와 신라 사이의 원한을 풀라고 하였으나 겉으로는 순종하는 체하면서 안으로는 위반함으로써 대국에 죄를 졌으니 그가 패망한 것은 당연한 일이 다.”→백제의 멸망은 당나라와 신라가 손을 잡고 침공해 왔기 때문이며 재위 16년(656) 간쟁하 던 좌평 성충을 가둔 것이나 나당연합군 침공 당시 좌평 홍수가 유배되어 있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지배층 내부가 분열되어 있었던 것
5. 후대 역사가들이 할 일: 후대 역사가들은 비판의 이면에 숨어 있는 의미를 찾아내어 온전한 과 거사를 복원해 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