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른스트 트뢸취와 역사주의의 극복 트뢸취 18651923 사상思想의 개인적 배경

 1  에른스트 트뢸취와 역사주의의 극복 트뢸취 18651923 사상思想의 개인적 배경-1
 2  에른스트 트뢸취와 역사주의의 극복 트뢸취 18651923 사상思想의 개인적 배경-2
 3  에른스트 트뢸취와 역사주의의 극복 트뢸취 18651923 사상思想의 개인적 배경-3
 4  에른스트 트뢸취와 역사주의의 극복 트뢸취 18651923 사상思想의 개인적 배경-4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에른스트 트뢸취와 역사주의의 극복 트뢸취 18651923 사상思想의 개인적 배경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바이에른의 신교 가문에서 부친이 의사인 가정환경에서 트뢸취는 일찍부터 해골과 해부도, 전기기구, 식물도감, 광물체 표본 등에 둘러싸여 어린 시절을 보냈다. 1880년대 당시 사상계(思想界)를 지배한 것은 Dawin의 진화론이었다. 자연과학자가 되기를 바라는 부친의 생각과는 달리 1884년 대학 진학 시에는 법학, 언어학, 철학 등의 영역 사이를 방황하다 결국 신학의 세계에 자리 잡게 되었다. 당시 신학의 주류는 이었고 트뢸취는 그것에서 흥미와 긴장과 심지어 혁명적 분위기까지 느끼게 되었다. 트뢸취는 칸트, 피히테, 슐라이에르마허 등의 사상을 편력(遍歷)하는 동시에 로쩨(Lotze)에 의해서 강조된 개체성(個體性)과 심리학에 접근하고 다시 딜타이 빌헬름 딜타이로 대표되는 독일의 정신과학적인 삶의 철학은, 베르그송처럼 삶을 전 우주의 넓이에서 파악하지 않고, 모든 형이상학에 대한 칸트의 경고를 받아들여, 역사 안에 있는 인간과 인류의 삶과 체험에만 한정하고 있다. 딜타이는 ‘보다 높은 영역’, 즉 형이상학이나 절대적인 가치의 왕국에 침입하지 않고, 삶을 삶 그 자체로 이해하려고 했다. 바로 이렇게 삶에만 한정하는 것만으로도 전형적인 삶의 철학이 된다. 딜타이는 그 출발점에 따라 심리학자와 정신과학의 역사가로 될 수밖에 없었다.
의 영향을 받아 역사에 대한 이해를 심화(深化)시킬 수 있었다. 이민호, 『역사주의-랑케에서 마이네케』 (서울: 민음사, 1988), 191-192.
2. 트뢸취 사상의 시대적 배경 - 역사주의(歷史主義)와 트뢸취
(1) 역사주의
이 시대의 신학의 흐름은 이랬다. 모든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요인은 신학에서 제거되고 신앙의 기초를 역사적 토대 위에서 추구하려는 분위기로 충만하였다. 18세기의 계몽주의 운동은 흔히 현대적, 비평적 역사를 시작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물론 계몽주의(啓蒙主義)가 그 방향으로 상당한 자극을 준 것은 사실이나 전체적으로 볼 때 그 운동은 구체적 사실보다는 일반적 원칙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역사를 경험과학(經驗科學)으로서 분류하게 되었던 것은 주로 19세기의 발명이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가 시작되어 드 베테(W. M. L. de Wette)의 『구약개론 기고』(Contributions to the Introduction of the Old Testament, 1806-1807) 으로부터 쥴리우스 벨하우젠(Julius Welljausen, 1844-1918) 의 저술을 통하여 네 문서 가설(Four Document Hypothesis)이 성립되었다. 이와 같은 연구방법은 곧 신약에도 적용되었고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까지 나아갔다. 유스토 곤잘레스, 『기독교 사상사』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4), 375-380.
비평적 방법들을 예수에 관한 복음서 전통에 적용한다는 것이 기독교 공동체의 가장 통렬한 문제 가운데 하나이기는 하였지만, 사건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고, 멈출 수도 없는 것이었다. 사고의 새로운 스타일이자, 의식의 새로운 형태였던 역사주의(Historicism)가 인간상황 해석의 모든 측면들을 더 좌우하게 되었다. 이제 기독교의 전체 현상이 역사적 맥락에서 관조되었다.
역사주의의 개념은 많은 학자들 사이에서 토론되어졌다. 역사주의의 개념에 대한 설명을 다음 몇 가지로 규정할 수 있다. 첫째, 개체성(個體性) 사상이다. 역사가는 과거의 전경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각개의 인물, 사건, 국가 등의 특수한 개체를 고찰한다. 랑케적 의미의 세계사는 셀 수 없이 크고 작은 개체성에 의해 채워지며, 역사의 모든 문화 가치는 역사적 개체성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둘째, 상대주의(相對主義)이다. 마이네케(Meinecke)는 역사주의가 상대주의를 나타낸다고 하였다. 각개의 역사적 제도와 이념은 생성의 끊임없는 흐름 속에서 곧 지나가버리는 순간으로 볼 수 있으며 모든 사물은 오직 상대적인 가치만 가지고 있다. 셋째, 역사 서술에 있어서 객관성(客觀性)을 주장한다. 허이시(Heussi)는 역사주의를 역사 서술에 있어서 객관에 대한 하나의 확실한 인식론적인 전제라고 하였다. 넷째, 역사의 법칙과 순환(循環)을 배격한다. 이것은 자연법을 반대하는 역사주의의 당연한 귀결이다. 김인석, “역사주의의 극복에 관하여-에른스트 트뢸취를 중심으로-,” 서양사론 제11권 1970. 한국서양사학회, 85-86.
(2) 역사주의(歷史主義)의 영향과 발전 그리고 역사주의의 위기
학문적으로 역사와 결부된 신학에 대한 관심은, 전승된 기독교의 교의적(敎義的) 절대성(絶對性)과 종교사 연구의 역사적(歷史的) 상대성(相對性)이 서로 상극(相剋)을 빚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하였다. 이에 역사적 세계가 현재 있는 그대로 그 복합성, 다양성을 재생시켜야 하는 것이라면 도대체 인간사의 유전(流轉) 속에서 진리와 가치가 자리할 땅이 어디에 있으며 우리가 설 땅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라는 절박한 질문이 대두되었다. 이민호, 『역사주의-랑케에서 마이네케』 (서울: 민음사, 1988), 191-192.
정치적으로 역사주의의 개체성(個體性) 사상은 독일 정신의 지도 이념으로서 비스마르크 제국의 창설자들에게 하나의 교의(敎義)를 제공하였다. 보편적인 것에 대한 지나친 거부에 기인한 상대주의는 가치의 무정부 상태에 빠질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고, 개체주의는 지나치게 고유하고 독립적이어야 한다는 의욕 때문에 편협(偏狹)한 민족주의로 빠질 위험이 있었으며, 사실상 그렇게 되었다. 역사주의의 위기는 세계대전을 통해서 나타났다. 김인석, “역사주의의 극복에 관하여-에른스트 트뢸취를 중심으로-,” 서양사론 제11권 1970. 한국서양사학회, 86.
모든 역사적 현상이 변화(變化), 유전(流轉)되는 가운데 현재를 사는 인간이 어떻게 그 위치를 확인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