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어학 공주시와 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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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인문어학 공주시와 백제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국어이해 레포트 주제로 공주시와 백제를 선정하게 되었다. 딱히 레포트를 쓰면 이런 주제로 써야지 생각하고 있었던 주제는 없었다. 마땅히 무엇을 주제로 선정해야 할지 몰랐을 때 마침 내가 공주에서 대학을 다니는 중인 사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평소에 역사를 좋아했던 나는 공주를 백제와 연결시켜 레포트를 쓰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다가 결국 주제로 ‘공주와 백제시’를 선정하게 되었다. 백제 당시의 공주시를 소개하자면 이렇다. 공주시는 백제의 22대 문주왕이 동원년(서기 475년 )에 하남 위례성(지금의 경기도 하남시)에서 왕도를 「웅진」(현재 공주)으로 옮기고 5대64년 간(문주왕 2년, 삼근왕 2년, 동성왕 22년, 무령왕 22년, 성왕 16년) 백제의 왕도로 내려오다가 백제의 중흥을 꾀한 성왕이 동 16년에 (서기 538년)왕도를 다시 「사비성」 (현재 부여)으로 천도 하였다. 전체적인 역사를 통틀어 공주시를 살펴보면 공주시는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불운국(不雲國)이였고, 백제가 위례성(慰禮城)에서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475년(문주왕1)이후 538년(성왕16) 부여로 천도하기까지 63년 동안 백제의 수도로 한나라의 중심적인 위치였었다. 백제가 멸망한 후 당나라는 웅진도독부를 두었고, 670년 신라가 차지한 후, 686년(신문왕6) 웅천주를 설치하여 13개 군 29개 현을 통괄하는 지역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다. 757년(경덕왕16)에는 옹주로 개칭하였다가 940년(태조23) 공주로 개칭하였고, 983년(성종2)에는 전국 12복 중하나인 공주목이 되었으며 993년(성종12)에는 하남도(河南道)에 속하였고, 1341년(충혜왕2)에는 목(牧)으로 승격하여 지역 중심지가 되었다. 조선조 세조 때에는 공주에 진관이 설치되었으며 1581년(선조14)에 충청감영이 충주에서 공주로 이전되어 다시 충청도의 중심지적인 위치로 되었다. 그 후 1895년(고종32) 공주군으로 개편되었고, 충청남도의 도청소재지가 되었다. 1931년 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되면서 공주는 하나의 면이 되면서 군중심지로 되었다. 그 후 1938년에 공주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86년에 공주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공주군과 분리되었다. 1995년에 다시 공주시·군이 통합되어 현재와 같은 위치로 되었다. 공주시의 총면적은 940.58㎢로 충청남도 총면적(8584.76㎢)의 10.96%를 차지하고 있어 도내의 15개 시군들 중에서 가장 넓은 지역이며 남한 총면적(99407.9㎢)의 약 0.95%에 해당되며, 경지(논과 밭)면적은 185.82㎢로 전체면적의 19.76%로 우리나라 전체 경지율보다 약간 낮은 편이며 논, 밭의 비율은 66:34로 전국평균(61:39)보다 논의 비율이 높은 편이나 임야율은 전국 평균보다 대략 5% 정도 높은 편이다. 이렇게 대략적으로 공주시에 대해 알아보고 다음 본론부터는 공주시가 수도로 채택된 배경, 왕들의 업적을 조사하고 조금 더 자세히 공주시에 대해 알아보자. http://www.gongju.go.kr(공주 시청 홈페이지 - 공주시 연혁)
본론
공주시는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백제의 22대 문주왕이 서기 475년에 하남 위례성에서 왕도를 「웅진」(현재 공주)으로 옮긴 것이 시초이다. 그렇다면 왜 문주왕은 수도를 옮겼어야 했으며, 왜 공주시가 수도로 채택 된 것일까?? 문주왕이 즉위하기 1년 전 백제는 고구려에게 한성에서 엄청난 패배를 당한 상황이었다. 왕과 왕비, 왕족들은 고구려군에게 모두 살해 당했고, 신라에 원병을 요청하러간 문주왕만이 살아남았기 때문에 문주왕은 자연스레 왕위를 계승하였다. 문주왕은 즉시 한성에서 왕위를 계승하였고, 공주로 수도를 옮기게 되었다. 문주왕이 웅진으로 천도하게 된 데는 다음의 몇 가지 배경이 적용되었다. 먼저 새로운 수도는 무엇보다도 방어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춘 지역이어야 하였다. 이미 고구려군에게 한번 크게 패한 상황이기 때문에 언제 있을지 모를 고구려의 공격을 막기 위해서는 지리적 조건은 필수적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공주지역은 북으로 차령산맥과 금강에 둘러싸여 있고, 동으로는 계룡산이 막고 있어서 고구려와 신라로부터의 침략을 방어해 주는 천험의 요새지였다. 그리고 이곳을 관통하여 흐르는 금강을 통해 서해로 나아갈 수 있고, 또한 남쪽에는 곡창지대인 넓은 호남평야가 펼쳐져 있어서 관방 뿐 아니라 교통과 경제의 요충지로서 좋은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도학 새로 쓰는 백제사, 푸른역사, 1997 (163,164p)
둘째로는 공주지역을 기반으로 한 재지세력의 동향도 무시할 수 없다. 위기의 상황에서 권위가 떨어진 왕실로서는 새로이 천도하려는 지역의 재지세력들의 협조가 필수적이었다. 이 시기에 공주 지역 재지세력의 존재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수촌리 고분군이다. 이 고분군에서는 금동관·금동식리·환두대도·중국제 도자기 등을 여러 대에 걸쳐 부장한 것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유물들은 이 고분의 주인공들이 백제에서 상당한 정도의 세력을 지닌 가문출신자였음을 보여주는데 이 세력이 백씨(氏)였을 가능성이 크다. 웅진 도읍기에 백씨 가문이 크게 두각을 나타낸 것은 웅진으로의 천도를 적극 지지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셋째로는 문주왕을 보좌하는 신하들의 의도도 일정하게 작용하였다. 이 시기 문주왕의 보신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는 인물은 목협만치와 조미걸취이다. 이중 목협만치는 근초고왕대에 가라 7국을 평정하는데 공로를 세운 목라근자의 후손이었다. 목라근자는 가라(加羅: 가야의 다른 이름) 7국을 평정할 때 세운 공로에 의해 가야제국과의 교역을 관장하였고, 또 웅진의 하다호리지역을 식읍으로 가지고 있었다.『일본서기』에 하다호리 현 앞에 임나가 붙여져 있는 것이 이를 말해준다. 목협만치는 자기 가문의 식읍이 있는 웅진으로 천도하는 것이 천도 이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데 유리한 것으로 판단한 것 같다. 이러한 조건이 어우러져 문주왕은 천도를 하는 장소로서 공주를 선택하게 되었다.
먼저 문주왕은 공주로 천도하고 재위기간을 2년밖에 채우지 못하였다. 하지만 문주왕은 천도를 한 뒤 정치, 경제적 상황을 안정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문주왕은 일단 급한 대로 지형적 조건에 의해 방어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곳에 왕궁을 조성하고, 그 주위에 성곽과 여러 정청 시설들을 단계적으로 마련해 나갔다. 그리고 문주왕은 한성에서 이주해온 귀족들과 평민들을 대두산성으로 보내 살도록 임시적으로 거처를 마련해주었다. 하지만 고구려군에게 무너진 군사체계를 복원하기위해 임명한 장군 해구에게 문주왕은 피살당하게 되고, 정치적으로 백제는 또다시 혼란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문주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삼근왕은 왕위에 오를 당시 13세 밖에 되지 않았다. 당시 삼근왕은 해구가 정치적, 군사적 실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허수아비왕일 뿐이었다. 이우경 새로운 삼국사기, 한국 문화사 2007 (382p)
해구가 신흥세력인 은솔 은신(燕信)과 대두성에서 반란을 일으키는데, 삼근왕이 덕솔 진로(眞老)에게 명하여 정예 군사 5백 명을 거느리고 해구를 공격하여 죽인다. 최의혁 단숨에 읽는 삼국시대사, 넥서스 1997 (137p)
하지만 재위 3년인 479년 봄과 여름에는 가뭄이 매우 심했고, 11월에 의문의 죽임을 당했다. 결과적으로 삼근왕은 별다른 업적 없이 나라의 혼란을 정비하지도 못 한 채 재위기간을 끝내게 된다.
삼근왕 이후 동성왕이 즉위하게 된다. 동성왕은 천도 이후 백제를 정치적 불안과 실추된 왕권의 회복을 모색하기 시작한 왕이다. 동성왕은 두려워하지 않는 힘이 남보다 뛰어났고 활을 잘 쏘아서 백번 쏘면 백번 맞혔다. 이우경 새로운 삼국사기, 한국 문화사 2007 (382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