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쿠데타의 주체세력 김종필과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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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쿠데타의 주체세력 김종필과 미국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미국은 516 이후 남한이 하루빨리 정치적 안정을 이루기를 희망하면서 쿠데타세력에게 조속한 민정이양을 조용하였다. 미국은 박정희를 ‘온건파’로 묘사하면서 정치적 소모전을 막고, 그를 경제발전 쪽으로 유도하고자 했던 반면 김종필은 ‘강경파’로 분류하여 그를 견제하고 박정희와 김종필을 분리하려 했다.
미국은 반대파에 대한 가혹한 숙청작업과 구정치인에 대한 정치활동 금지, 중앙정보부 1961년 6월 10일 법률 제619호〈중앙정보부〉에 의해 국가재건최고회의 직소긍로 발족된 정보 수사기관. 약칭 중정.
의 비밀경찰활동 등 쿠데타정부의 강경책 대부분이 김종필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고 판단했다. 군사정부 내에서 김재춘을 비롯한 육사 5기와 김종필을 중심으로 한 육사 8기가 갈등을 겪고 있을 당시 미국은 한때 김종필 제거를 적극 추진했다고 주한미군사령부의 한 전문은 전하고 있다. 멜로이 주한미군사령관은 1962년 7월 9일 렘니처 함참의장에게 보낸 「한국의 현재상황에 대한 평가」라는 전문에서 김종필의 횡포를 강력히 비판했다.
“중정은 그 영향력을 경제분야로 확대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왔다.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을 비롯한 일파들은 증권시장에 대한 의심스러운 조작을 통해 무려 3백80억 환을 얻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증권파동. 1962~1963년에 중앙정보부가 대한증권거래소를 직접 장악, 주가조작을 통해 엄청난 부당이득을 챙긴 사건. 워커힐 사건, 새나라자동차 사건, 회전당구사건과 함께 4대 의혹 사건이라고 불린다.
, 그 방법은 아주 위법적인 것이었다. 중정은 또 이른바 반혁명에 대한 수사조사 등의 위협을 가함으로써 거의 모든 경제활동에 개입하고 있다. 이른바 반혁명에 대한 수사조사 등의 위협을 가함으로써 거의 모든 경제활동에 개입하고 있다. 이러한 김부장의 권력확대가 현재 정치적 불안의 주요원인이다.” 멜로이는 “김종필 분파와 군내 여타 세력 간의 갈등은 내전 혹은 쿠데타로 확대될 위험까지 있다.”고 덧붙이고 있다. 이같은 상황설명에 이어 멜로이는 그 대안으로 “김부장의 권력을 현저히 줄이고 가능하다면 중정 부장직에서 제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제안하였다.
극동담당 대통령보좌관이자 국가안보회의 상임위원인 마이클 포레스탈도 1963년에 맥조지 번디 대통령 안보담당 특별보좌관에게 보낸 멤에서 “박의장의 조카사위이면서 그의 측근이기도 한 김부장이 1962년 2월과 5월 사이에 증권시장을 조작해 2천만~3천만 달러에 이르는 한국 역사상 최대의 금융쿠데타를 일으킨 것으로 밝혀진 바 있다.”고 김종필을 공격했다.
미국이 이처럼 김종필을 경계한 것은 역으로 그가 가진 상황돌파력과 탁월한 정치적 수완을 염두해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CIA는 1963년 1월 대통령에게 보고한 「한국의 위기」라는 보고전문에서 “쿠데타 시초부터 주요인물이었던 김부장은 지금까지 쿠데타세력 내부의 반대파를 제거하는데 성공했으며 민간정치인은 정치활동금지로 묶어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면서 “이 조치들은 김부장이 군부통치를 영속화하기 위한 작업”이라고 경계의 눈초리를 떼지 않고 있었다. CIA는 특히 “김부장이 박의장을 대통령후보로, 자신은 창당될 공화당 민주공화당. 제3 4공화국의 집권여당. 5 16 주체세력을 중심으로 〈혁명이념의 계승과 민족적 민주주의 구현〉을 표방하면서 1963년 2월 26일 창당되었다.
의장으로 만들어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려 하고 있다.”고 말해 민정이양 후 박의장의 대통령 후보 출마를 1년 전에 정확히 예견하였다.
미국과 김종필의 관계에서 가장 극적인 것은 역시 한일회담이었다. 쿠데타권력 내부에서 한일회담에 가장 적극적인 분파가 김종필파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그를 부추겼던 것은 미국이었다. CIA는 “김이 미국의 지원을 얻기 위해서는 한일관계 정상화가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따라서 한일회담의 조기타결을 적극 추진할 것”이라고, 1962년과 1963년에 작성된 수 차례의 보고서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한일회담의 조기타결을 앞두고 1964년 이에 반대하는 6 3사태가 있었을 때 김종필 제거를 계엄령 선포를 위한 전제조건으로 내세운 것도 미국이었다. 공화당 사전조직 문제로 쿠데타 주체세력 간의 갈등이 격화된 1963년 1월 말 좀더 온건한 방향으로 기울려는 박의장을 권고해 결국 김종필을 외유(外遊) 공부나 유람을 목적으로 외국에 여행함.
보내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 역시 주한미대사 버거였다.
버거는 “김은 정치안정과 경제발전이라는 현재의 과제를 오히려 저해하고 있다.”면서 박의장에게 그의 제거를 촉구했으며 1월 25일에는 박의장과 이 문제에 대한 담판을 지었던 것으로 백악관 문서들은 전하고 있다. 러스크 국무장관은 이런 버거의 노력에 대하 1963년 1월 24일자로 보낸 전문에서 “박의장이 이런 결론을 내리도록 노력한 대사에게 치하한다.”고 적고 있다.
주석 참고
이이화감수,《한국근현대사사전》, (가람기획, 1995)
이희승감수,《민중 엣센스 국어사전 제5판》, (민중서림,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