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국시대의 상황과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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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남북국시대의 상황과 문학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589년에는 수나라가, 618년에는 당나라가 중국 대륙에 들어서고 이웃 여러 나라에까지 정치적, 문화적 영향력을 크게 행사하기 시작했던 것은 문학사에서도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한문문명권의 당나라는 유교와 불교라는 보편종교를 가졌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중세문명 창조에 동참하기 위하여 지리상의 위치로 보아 당나라의 한문문명을 받아 택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 시기 한문문명권은 아랍어문명권이나 라틴어문명권보다 앞서 나가면서 불교를 수용함에 따라 한층 선진인 산스크리트문명권 따르고 있었다. 수고를 무릅쓰고 문명권 중심부 당나라 수도 장안을 왕래한 여러 민족, 많은 나라의 지식인들이 문명 창조의 기존성과를 나누어 갖고, 자기네가 가진 것을 보태주어 융합이 더 큰 규모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 전후시기에 동아시아 각국은 주목할 만한 발전을 이룩했다. 우리 쪽에서는 신라가 668년에 삼국을 통일했다가 935년에 망하고 고려가 대신 들어서서 더 큰 규모의 재통일을 이룩했다. 통일신라는 당나라에서 이룩한 중세문명을 받아들이고 재창조하는 데 앞섰다. 신라와 남북국의 관계에 있었던 발해는 698년에 건국해서 926년까지 지속되는 동안에 당나라와의 교류에서 신라와 경쟁했으며 일본과도 사신을 교환하기도 했다. 당나라에서 이룩한 중세문명에서 문학은 특별한 위치를 차지했는데, 위진남북조시대가 이룩한 성과를 더욱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켜 시에서는 근체시, 문에서는 고문이라는 새로운 갈래를 갖추고, 불변의 규범을 마련했다. 사신이 왕래하면서 국서를 전달하고 시를 주고받는 관례를 확립해 한문학에 함께 참여하는 나라라면 어디서나 같은 방식으로 통용되었다. 그러나 그 결과 천하가 하나가 되어 태평을 함께 누렸던 것은 아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나라 사이의 싸움 또는 민족 문화의 차이 때문에 벌어지는 갈등이 심각했던 것이다.
따라서 신라나 발해는 이에 맞서서 나라를 지켜야만 했기 때문에 당나라와 경재하면서 민족 문화를 수립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계속 나타나게 된다. 이것은 한자를 빌려서 한문을 쓰면서도 각국의 어법을 살려 쓰는 글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신라의 향찰이 대표적이다. 공동문어로 보편적인 문명을 이룩하는 데 참여하면서 자국어문학을 개척해 민족문화를 발전시키는 이중의 작업을 어디서나 함께 하고, 그 구체적인 양상은 경우에 따라 상당히 달랐다.
2 발해 문학의 위치
발해가 우리 역사의 범위 안에 포함되는가 하는 시비는 많은 논란이 있었으나 아직도 결말에 이르지 않았다. 이것의 근본원인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남북국시대’라는 것 자체가 아직 누구에게나 익숙한 말이 아니라는 점과, 일반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아직 대다수가 이 명칭의 사용에 대해 거부도 동조도 주저하고 있는 실정이라는 것에서부터 문제 삼아야 할 부분이다. ‘남북국 시대’는 다름 아닌 신라, 발해의 남북 대립 시대를 말한다. 고구려, 백제의 멸망과 함께 남쪽에서 신라에 의한 반도 통일이 이룩되고 북쪽에서는 고구려의 옛 땅에 발해의 건국이 성취되어 우리 역사는 드디어 삼국시대로부터 남북국시대로 접어들었고, 이 남북국시대는 장장 이백 수십 년을 지나 다시 고려시대로 바뀌는 것이다. 그러니까 남북국시대는 7세기말에 시작해서 10세기 초엽에 그 막을 내렸던 것이다. 이 남북국이라는 말은 결코 오늘에 와서 어느 한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 스스로가 이미 사용했던 말로, 신라인들이 발해를 가리켜 북국이라고 한 것은 신라의 문헌에서 뚜렷이 볼 수 있는 바이며 신라 孝恭王 때 당에 보낸 謝不許北國居上表가 그 예. 897년에 渤海 왕자 大封裔가 당에 가서 발해 사절단의 석차를 신라의 위에 두어 주기를 청한 데 대해 당이 불허하자 신라가 당에 사의를 표한 것이다. 이 밖에 渤海를 ‘北國’이라 한 것은 三國史記 新羅本紀에 두 군데나 보인다.
, 따라서 발해인들도 신라를 남국(南國)이라고 했을 것임이 분명하나, 다만 발해의 문헌이 인멸되어 그것을 남긴 기록이 없을 따름이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남북국시대라는 말이 지금껏 일반화되지 못하고 있는 원인은 두 가지로 살펴 볼 수 잇는데, 하나는 김부식의 일파의 영향으로 볼 수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일제 관학자들의 영향 때문이다. 먼저 김부식 일파의 영향을 살펴보기로 한다. 『삼국사기』는 삼국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삼국의 성립과 더불어 시작해서 삼국시대의 종결과 더불어 끝나야 할 것이다. 그런데 660년에 백제가 망하고 668년에 고구려가 망하면서 남에는 신라가 반도를 통일하고 북에는 발해가 새로 건국됨으로써 이미 삼국 시대는 종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그대로 계속되어 이후 장장 이백 수십 년간 신라 단독의 역사를 다루어 놓았다. 그러면서 새로운 시대를 삼국시대와는 달리 새로운 시대사로 다룰 것을 생각지 않고 ‘삼국’속에 그대로 몰각시켜, 시대사의 단순한 연장으로 그대로 서술하여 고려시대에 연결시켜 버리면서 남북국시대의 존재를 부인해 버린 동시에 7세기 말로부터 10세기 초엽까지의 이백 수십 년 동안의 우리나라 역사에는 신라만이 있을 뿐이고 발해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된다. 다음으로 남북국시대가 일반화 되지 못하고 있는 두 번째 원인은 알아보면 앞서 언급했듯이 일제 관학자들의 영향 때문이다. 일제 관학자들은 식민지정책의 기조인 분할 통치의 원리를 역사학에 적용시켜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멋대로 분할해 놓았다. 즉, 고대의 한(韓), 예(濊)를 각기 다른 민족으로 만들고 남방문화, 북방문화 하는 식으로 문화계보를 갈라서 말하고 심지어 고구려를 우리 역사에서 떼어 내어 ‘만주사’라는 가설의 역사권 속에 따로 넣어 두기도 한 형편이니 『삼국사기』에서 버림받은 발해사야 두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이우성,『한국의 역사상』, 창작과 비평사, 1997, p.147-p.153 참조.
이러한 원인 때문에 발해가 우리 역사에 포함되는가 하는 시비를 둘러싸고 많은 논란이 있고 아직도 결말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역사의 소속관계를 판가름 하는 기준이 무엇인가 검토해야 해결에 접근할 수 있다. 근대민족국가의 관점을 내세워 견해차를 확대하지 말고, 중세는 근대와 달랐던 점을 이해해야 한다.
발해의 건국과정을 보면 대조영이 당군의 침공을 피하면서 고구려 유민을 규합할 때 신라에 원조를 청한 일이 있었는데, 신라 조정에서는 대조영에게 다섯 번째 관등인 대아찬을 내렸다. 대아찬은 진골이라야 차지할 수 있는 직위여서 파격적인 우대를 했다고 할 수 있다. 신라는 790년과 812년에 두 차례 ‘북국’에 사신을 보냈다고 에 기록되어 있다. 국서가 남아 있지 않아 자세한 사정을 파악할 수 없으나, 두 나라의 관계가 호칭을 통해 추측가능하다. 발해가 ‘북국’이라면 신라는 ‘남국’인 것이다. 발해와 일본이 주고받은 국서는 일본에 보존되어 있어 발해가 어떤 나라인가 좀더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하는데 726년에 일본에 보낸 국서에는 발해는 고려의 옛 터전을 회복하고 부여가 남긴 풍속을 간직했다고 했다.
당나라의 교류에는 남북국이 모두 적극성을 띠었다. 발해는 당나라에 유학생을 많이 보냈다. 당나라는 산동반도 등주에 신라관과 발해관을 설치해 두 나라의 관계를 함께 활성화하였고 신라와 발해과거에서 두 나라 인재가 급제하는 수를 같게 하며 수석과 차석을 교대로 안배하는 정책을 취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두 나라에 대해 동등한 대접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두 나라의 경쟁심, 시기심을 조장시켜 서로간의 적대감정을 상하게 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오랑캐로 오랑캐를 무찌른다는 뜻으로, 한 세력을 이용하여 다른 세력을 제어함을 이르는 말.
정책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발해문인이 당나라에서 벼슬하기도 하고, 얼마 동안 머물면서 재능을 가다듬고 문단에서 활동하다 귀국하기도 했는데, 당나라 문인이 발해인에게 준 시가 몇 편 남아 있어서 그런 사정을 살피는 데 소중한 자료가 된다. 특히 주목할 것이 온정균의 이다. 본문을 먼저 살펴보기로 한다.
疆理雖重海 국경을 정하고 나라를 다스림에 바다를 중시하지만
車書本一家 문화의 뿌리는 본래 한 집안이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