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한문학의 성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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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신라 한문학의 성숙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통일신라에서, 무열왕계를 대신해, 원성왕대 이후, 내물왕계가 왕위를 차지하면서 신라는 ‘하대’라고 하는 말기로 접어들었다. 당시 신라는 군자지향(君子之鄕)이니, 태평승지(太平勝地)니 하는 자부심이 거의 일반화될 정도로 문화가 난숙한 경지에 이르렀지만, 반면 진취적인 기상 같은 것은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당시엔 문학적 소양을 갖춘 국왕이 적지 않았다. 경문왕과 같은 경우, 수준 높은 문학이론을 정밀하게 전개한 책을 관심을 갖고 탐독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경문왕의 아들인 헌강왕도 국학에 거동해 강론을 들었으며, 진성여왕 또한, 역대 향가를 모아 을 편찬하라고 지시하였을 정도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일찍이 흥덕왕은 앵무새 한쌍을 기르다가 한 마리만 남아 거울속의 자기 그림자를 보다가 슬피 울며 죽은 것을 보고 를 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문학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고 볼 수 있으나, 세상을 돌보지 않는 자기도취의 표현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특히, 경애왕이 지은 은, 더욱 극단적인 상황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망해가고 있는 나라 상황 속에서, 경애왕이 그 무리와 함께 나날이 잔치를 벌이며 무료함을 달래는 것으로 일삼고 자기 스스로 그런 제목의 꽃노래를 지어 미인들에게 노래하라고 한 것이다. 이는 이 아무리 감각적으로 예민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더라도, 세상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신라 말기 사회는 그 모순이 격화되었고, 왕위를 빼앗는 살육전이 벌어지며, 백성에 대한 수탈이 갈수록 가혹해지며, 국력이 약화되고, 민심은 뒤돌아섰다. 이에, 육두품 지식인들은 지배체제에 대한 불만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당나라에 가서 빈공과에 응시해 재능을 발휘하고 진출하는 길을 찾은 것으로 볼 수 있다.
2>왕거인의 분원시(忿怨詩)
왕거인은 신라 진성여왕 때의 문인으로 합천 출신이다. 진성여왕은 당시 젊은 미소년을 궁중에 불러들여 음란하게 지내고, 이들에게 요직을 주어 나라 정사를 맡겼다. 이로 말미암아, 아첨하고, 총애 받는 사람이 날뛰고 재물로 뇌물을 주는 일이 공공연하게 있자, 이름 모를 사람이 시국의 정책을 비방하는 말을 만들어 관청의 거리에 방을 붙였다. 문자는 다라니(陀羅尼)의 은어인 <나무망국 찰니나제 판니판니소판니 우우삼아간 부이사바하(南無亡國 刹尼那帝 判尼判尼 蘇判尼 于于三阿干 鳧伊裟婆詞)>인데, 해설자가 찰니나제는 여왕, 판니판니 소판니는 두 소판, 우우는 세 아간(阿干), 부이(鳧伊)는 부호(鳧好;魏弘의 처)의 뜻이라 하였음.
*다라니(陀羅尼) - 석가의 가르침의 정요(精要)로서, 신비적 힘을 가진 것으로 믿어지는 주문(呪文). 자체에 무궁한 뜻이 있어, 이를 외는 사람은 한없는 기억력을 얻고, 모든 재액에서 벗어나는 등 많은 공덕을 받는다고 한다.
이에, 진성여왕은 곧 범인을 수색하게 하였으나 잡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는 뜻을 잃은 문인(文人)의 소행일 것으로 간주하고, 그 용의자로 대야주(大耶州)의 왕거인을 지목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진성여왕은 왕거인을 옥에다 가두고 죽이려 했다. 왕거인이 시를 지어 원통함을 하소연하니 갑자기 구름이 끼고 벼락이 치며, 우박이 쏟아져 왕은 크게 두려워 왕거인을 석방했다고「삼국사기」에 수록되어 있으며, 「삼국유사」에서는 이와는 다르게 기술하여, 하늘이 벼락을 쳐서 옥을 깨뜨리고 왕거인을 석방시켰다고 한다. 왕거인이 옥중에서 지었다는 시가. 바로 이다.
于公通哭三年旱(우공 우공 - 한나라 때의 사람으로, 그가 현(縣)의 옥리(獄吏)가 되었을 때, 현에 효부가 있었는데, 그 남편이 일찍 죽었으나 절개를 지켜 개가를 하지 않았다. 그러자 시어머니는 오히려 개가하도록 권하였다. 그래도 개가를 하지 않으니 시어머니는 늙은 자신이 짐이 된다하여 자살을 하였다. 딸은 효부인 과부가 시어머니를 죽였다고 고발하였다. 태수가 그 효부를 의심하여 벌하려 함에 우공이 그렇지 않을 것을 주장하였으나, 끝내 효부를 사형하였고, 그 고을에 3년동안 큰 가뭄이 들엇다. 태수가 교체되어 그 까닭을 살피니, 우공이 “효부가 억울하게 죽어서 이런 결과를 부른다.”고 하여 효부의 무덤에 제사를 지내니, 큰 비가 내리고 고을에 풍년이 들어 사람들이 우공을 크게 존경하였다고 한다.
통곡삼년한) 우공이 통곡을 하니 삼년이나 가뭄이 들고
鄒衍含悲五月霜(추연 추연 - 전국시대 제(齊)나라 사람으로 연(燕) 혜왕(惠王)에 의해 억울하게 하옥이 되자, 오뉴월 여름철에 서리가 내렸다는 이야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