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의 만무방 작품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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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김유정金裕貞(1908~1937)은 스물아홉 짧은 생애 동안 소설30편, 수필12편, 편지, 일기6편, 번역소설2편을 남긴 작가다 1996년까지 나온 김유정 문학에 대한 연구 논문이 무려 360편에 이르는데, 이렇게 쏟아지는 연구 논문은 그의 문학사적 위치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단적인 보기다. 김유정은 1908년 1월 11일 일제 때의 행정 지면으로 강원도 춘천부 남내이작면 실레 마을이라는 곳에서 아버지 김춘식과 어머니 심씨 사이의 2남 6녀 중 일곱째이자 차남으로 태어난다. 김유정이 살던 실레 마을은 국적토벌, 국모보수, 배양척외의 기치를 내걸고 서울로 진격하는 춘천 의병진의 후방 기지가 있던 곳이다. 어릴 적에 본 의병들의 모습은 뒷날 김유정의 작품에 등장하는 소작농, 유랑민, 노동자, 실업가, 거지에 이르는 다양하고 생생한 하층 계급 인물을 창조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1913년 김유정 일가는 현금과 토지일부를 정리해 서울 종로구 운니동의 1백여 칸짜리 살림집으로 이사를 한다. 그런데 이사할 무렵부터 시름시름 앓던 어머니가 갖은 약을 다 써도 일어나지 못하고 이듬해 숨을 거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3년 뒤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 아직 부모의 보살핌이 필요한 나이에 김유정은 고아가 된다. 실질적인 가장이 된 그의 형 유근은 운니동의 집을 처분하고 관철동으로 이사를 한다. 어린 유정은 저녁마다 근처의 우미관에서 들려오는 나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죽은 어머니를 그리워한다. 형 유근은 선대에 악착같이 모은 재산을 주색잡기로 탕진하는 데 바빠 어린 동생의 허전한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다. 어머니에 대한 그의 남다른 그리움은 연희전문 시절까지 이어져 여인 박녹주에 대한 짝사랑으로 나타난다.
1929년 연희전문학교에 갓 들어난 김유정은 명월관 기생이자 남도창을 하는 박녹주에게 막무가내로 연애편지를 보낸다. 이윽고 연희전문 학생과 기생 박녹주 사이의 염문은 장안에 파다하게 퍼진다. 그러나 혈서도, 애원도, 협박도 효과가 없어 김유정의 짝사랑은 무참히 짓밟히고 만다.
형 유근이 술과 여자에 빠져 가산을 탕진한 여파로 김유정은 1930년 학교를 중퇴한다. 혜화동 언저리의 허름한 방에서 지내다가 늑막염에 걸려 고생하던 그는 1931년 고향인 실레 마을로 내려간다. 고향에서 그는 요양에만 매달리지 않고 틈틈이 장만한 나무로 야학당을 지어 글 모르는 이들을 모아 가르친다. 1932년에는 충청도 지방의 금광을 비롯해 곳곳을 떠도는데, 그는 이렇게 떠돌이 생활을 하며 많은 것을 체험한다.
1932년 김유정은 다시 실레 마을로 가서 본격적인 계몽 운동에 나선다. 이 무렵은 1920년대에 산발적으로 이루어지던 브나로드, 곧 농촌 계몽 운동이 조직화되어 펼쳐지던 시기다. 그는 학생들과 마을 청년들을 모아 농우회를 조직하고, 이를 발전시켜 정식으로 간이 학교 인가를 받아 금병의숙(金屛義塾)을 설립한다. 그러나 형의 음주벽과 가족에 대한 횡포가 갈수록 심해지자 1933년부터는 서울로 와서 조카, 형수와 함께 창신동, 신당동, 효제동 등을 전전하며 셋방살이를 한다.
김유정은 이 무렵부터 글쓰기에 매달리는데, 1933년 1월 13일를 탈고한 데 이어 8월 6일에는 를 탈고한다. 그는 밤마다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은 채 깨어나 소설을 쓴다. 그 즈음 김유정은 시립위생병원에서 폐결핵을 선고 받는다. 결핵균에 의해 이미 쇠약해진 몸으로 그는 어두운 운명의 그림자를 떨쳐버리려고 필사적으로 투쟁한다. 1933년 발족된 ‘구인회’에 들어가면서 그의 창작 활동은 더욱 불붙기 시작한다. 그는 구인회 회지 《시와 소설》에 ,《개벽》3월호에 ,《중앙일보》에 ,《조선일보》에 ,《조광》12월호에 들을 잇달아 발표한다. 그러다가 1935년 《조선일보》신춘문예에 ,《중외일보》신춘문예에 가 동시에 당선되는 것이다. 어찌보면 김유정에게 소설은 일종의 도피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미 형 유근이 그 많던 선대의 가산을 거의 다 날린 뒤여서 그에게 돌아올 몫은 남아있지 않았다. 어른이 되어서도 독립할 수 없는 비참한 처지, 암울한 시대 상황, 정신적 고립감,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쓰라린 기억, 그리고 폐결핵 선고, 소설 쓰기는 이 모든 시름과 고뇌, 우울과 절망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몸짓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구인회 시절에 김유정은 삶과 죽음에 걸쳐 각별한 관계를 맺게 되는 이상과 만난다. 두 사람은 집안 형편이 비슷하고 문학관도 웬만큼 통하는 사이였으니, 특히 같이 폐결핵을 앓으면서 더욱 가까이 묶인다.
“각혈이 여전하십니까?”
“네, 그저 그날이 그날 같습니다.”
“치질이 여전하십니까?”
“네, 그저 그날이 그날 같습니다.”
“유정! 유정만 싫지 않다면 나는 오늘 밤으로 치러버릴 작정입니다. 일개 요물에 부상당해 죽는 것이 아니라 27세 일기를 불우한 천재가 되기 위해 죽는 것입니다!” 1936년 가을. 이렇게 은밀하게 찬란한 동반 자살을 모의하던 두 사람은 1년도 채 지나기 전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세상을 버리게 된다. 1936년 김유정은 만성적인 늑막염과 치질, 폐결핵으로 말미암아 정릉 언저리의 암자에서 휴양을 한다. 휴양 중에도 글쓰기는 이어져 같은 해《사해공론》에 ,《여성》에 , ,《조광》에 , 을 발표한다. 그는 이듬해인 1937년 초까지 글쓰기를 멈추지 않아《조광》에 ,,《여성》에 , 등을 발표한다. 그러나 가난 때문에 약을 제대로 쓰지 못해 김유정의 건강은 날로 악화된다. 암자에서 내려온 그는 병든 몸으로 다시 효제동 셋방과 매형의 집 등을 전전한다. 나중에는 고통이 너무 심한 나머지 아편까지 쓰지만 1937년 3월 29일, 김유정은 다섯째 누이의 집이 있던 경기도 광주에서 스물아홉 나이로 삶을 마감한다. 20여일 뒤 멀리 도쿄에 있던 이상도 끝내 김유정의 뒤를 따른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김영기, , 지문사, 1992, 6.
유인순, , 솔과학, 2003, 4.
권영민, , 민음사, 2002, 8.
장석주, , 시공사, 2000, 10.
임형택, , 창작과비평사, 1996,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