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과 김종서 군신관계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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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세종대왕과 김종서 군신관계 고찰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세종대의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많은 인물들과 그 인물에 관련된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세종시대에는 집현전에서 양성한 인재들이 든든한 밑거름이 되어 유례없는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그 뿐만 아니라 인재의 등용에 있어 그 능력이 인정된다면 신분에 얽매이지 않고 등용하여 눈부신 성과를 얻어내었다. 이런 적극적인 인재등용은 그가 정책을 추진할 때 매우 긍정적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런 인재들을 바탕으로 세종대왕은 학자적인 면모를 보이며 한글창제 같은 학문적인 정책을 추진하였지만 대마도 정벌이나 북방개척 같은 군사적인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런 군사적인 정택을 추진할 때에도 여러 장수들이 세종대왕을 도왔는데 그 중 가장 돋보이는 사람이 바로 ‘김종서’ 이다. 세종대왕은 많은 신하들을 아끼고 곁에 두었지만 특히 김종서와의 관계는 군신의 관계를 뛰어넘는 인연이 존재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 인연은 세종대왕과 김종서의 가장 큰 성과인 4군6진 개척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일화와 사건들을 만들어 내었는데 이런 것들을 통해 세종과 김종서의 특별하고 끈끈한 군신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김종서는 누구인가?
1.김종서가 걸어온 길
김종서는 ‘김종서 장군’ 이라고 알려질 정도로 군사의 이미지가 매우 강하여 무신(武臣)으로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사실 그는 당당하게 과거에 급제한 문신(文臣)이다. 본관은 순천(順天)이며 자는 국경(國卿)이다. 그리고 호는 절재(節齋)로서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태종 5년인 1405년 문과에 급제하여 세종원년에 사간원우정언(司諫院右正言)으로 등용되고, 이어서 지평(持平) ·집의(執義) ·우부대언(右副代言)을 지냈다. 1433년에는 함길도 도관찰사(咸吉道都觀察使)가 되어 야인(野人)들의 침입을 격퇴하고 6진(鎭)을 설치하여 두만강을 경계로 국경선을 확정하는 성과를 이루어 내었다. 그리고 1435년 함길도병마도절제사(咸吉道兵馬都節制使)를 겸직하면서 야인들의 정세를 탐색한 후 보고하여 그 대비책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440년 형조판서로 승진하고, 예조판서 ·우참찬(右參贊)을 역임하다가, 1449년 권제(權方) 등이 고친 《고려사(高麗史)》가 잘못되었다 하여 왕명으로 개찬(改撰)하게 되자 춘추관지사(春秋館知事)로 총책임을 맡아 1451년 간행하였다. 평안도 도절제사(平安道都節制使)를 거쳐 1450년 좌찬성(左贊成)으로 평안도도체찰사(平安道都體察使)를 겸하였다. 다음해 우의정에 오르고, 1452년 《세종실록》의 총재관(摠裁官)이 되었으며,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편찬을 감수하여 간행하였다. 이 뿐만 아니라 후에 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죽자 영의정 황보 인(皇甫仁), 우의정 정분(鄭)과 함께 좌의정으로서 유명(遺命)을 받아 12세의 단종(端宗)을 보필하며 대호(大虎)라는 별호까지 붙은 지용(智勇)을 겸비한 명신(名臣)이었으나, 왕위를 노리던 수양대군(首陽大君:후의 世祖)에 의하여 단종 원년인1453년에 두 아들과 함께 집에서 격살(擊殺)되고 대역모반죄(大逆謀叛罪)라는 누명으로 효시(梟示)됨으로써 계유정난(癸酉靖難)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되었다.
2.백성을 먼저 생각하는 김종서
대부분의 시대가 그러하듯 조선시대 역시 세금이라는 명목으로 관료들의 수탈을 받고 있었다. 김종서는 이런 백성들의 고초를 이해하고 이를 개선하려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세종즉위년 11월말에 강원도 관찰사 이종선이 금년 수확량이 지나치게 높게 책정되어 백성들의 원성이 높다는 징계를 올린다. 수확량이 높게 책정되었다는 것은 백성들이 그만큼 세금을 많이 내야 했기 때문에 원성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세종이 세법을 개정하기 전에는 고려 말에 시행했던 답험손실법(踏驗損失法)이라는 전세 제도를 통해 세금을 거두었는데 본래는 농민의 고충을 덜어주기 위해 시행하였던 세금법이 시대가 바뀌고 변질되면서 오히려 농민들을 괴롭히고 있었던 것이다. 이 징계를 받은 세종은 그 실상을 파악하기위해 당시 사헌부 감찰 김종서를 감찰어사로 파견한다. 세종의 머릿속에 감찰어사로 여러 명의 후보가 있었겠지만 그 중에서도 김종서를 선택한 것은 그가 평소 성품이 바르고 고관도 두려워하지 않아 서슴없이 탄핵을 강직하는 성격이 큰 이유로 작용했을 것이다. 김종서는 강원도로 파견을 나가자마자 찬바람과 폭설에도 직접 강원도의 곳곳을 살피었고 그 결과 수확량으로 책정되었던 것과는 달리 극도의 흉년으로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이런 현실을 세종에게 낱낱이 보고하였고 그 대책으로 조세를 면제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먼저 감찰사로 나가서 세종에게 허위보고를 올린 김습의 처벌을 주청하여 그의 강직한 면모를 다시 한번 보여준다. 사적인 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임무에 최선을 다 하는 김종서의 모습에 세종대왕은 깊은 감동을 받는다. 그것은 아마도 김종서의 이런 강직한 모습이 정책을 추진할 때 세종자신의 모습과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세종대왕은 김종서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어 했을까?
1.김종서에게 활과 화살을 내리다.
세종14년 2월에 세종대왕은 느닷없이 김종서에게 활과 화살을 내려 주었다. 이 활과 화살을 내린 사실 보다 “항상 차고 있다가 짐승을 쏴라.” 라고 말한 세종의 말이 더욱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문신인 김종서에게 무기를 항상 차고 다니라는 당부는 그 의문을 더욱 가중시킨다. 김종서 역시 하사받은 활을 보며 수많은 생각에 잠겼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세종은 김종서에게 비상근무령을 내린다. “내가 병중인데다가 마침 사신의 일로 마음이 번거로운데, 환시(宦侍)들이 복잡한 사연을 다 전하지 못하는 것 같으므로 몸과 마음이 피곤하니, 경은 지금부터 재계하고 밤낮으로 공소(公所)에 있으면서 나의 말하는 바를 듣고 밖에 전하라.” 이 전지(傳旨)를 받은 김종서는 즉각 대궐로 달려갔고 이 소식을 들은 세종은 김종서를 불러들이고는 말했다. “내가 풍질(風疾)을 얻은 까닭을 경은 모를 것이다. 지난번 한창 더웠을 때 경복궁에 있었는데 한낮이 되어 잠시 이층에 올라가서 창문 앞에 누워 잠깐 잠이 들었다. 갑자기 두 어깨 사이가 찌르는 듯이 아팠는데 이튿날에는 다시 회복되었다가, 사오 일을 지나니 또 찌르는 듯이 아팠다. 밤이 지나면서 약간 부었는데, 이 뒤로부터는 때도 없이 발짝하여 혹 이삼 일이 가기도 하고, 육칠 일을 거르기도 하였는데, 지금까지 끊이지 않아서 드디어 묵은 병이 되었다. 30살 이전에 매던 띠가 모두 헐거워 졌으니 이것으로 허리둘레가 줄어든 것을 알겠다. 내 나이가 33세인데 살쩍의 터럭 두 오리가 갑자기 하얗게 세었으므로, 곁에 모시는 아이들이 놀라고 괴이히 여겨 뽑고자 하기에, 내가 말리며 병이 많은 탓이니 뽑지 말라고 말했다. 내 몸이 전에 비해 쇠해졌고 병도 날마다 더욱 심하니 경은 그런 줄 알라.” 당시 명나라 사신문제로 근심이 많았던 세종의 애처로운 모습이 그의 말속에 그대로 묻어난다. 그리고 이런 심정을 김종서에게 털어놓은 것은 활과 화살을 항상 차고 있으라는 말에 대한 답변이기도 한 것 같다. 김종서에게 밤낮으로 공소하며 자신과 뜻을 함께하고 위험이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그리고 조선을 보호해 줄 것을 청한 것이라고 보여 지기 때문이다.
2. 함길도 감사로 제수 받은 김종서
세종은 함길도 감사로 제수 받은 김종서에게 모의(毛衣)와 모관(毛冠)을 하사 했다. 일년 중 가장 추운 12월 중순에 함길도 감사 자리는 귀양을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세종은 이런 혹독하고 위험한 지역에 평소 아끼던 김종서를 보내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 한 일이었다. 북방에 자리 잡은 그곳은 아는 사람도 없을뿐더러 야인의 잦은 침입으로 치안이 몹시 불안한 곳이었으니 함길도 감사라는 자리는 좌천을 가는 모양과 흡사하게 보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시선이었다. 보통 군주들은 자신이 매우 아끼고 신임하는 신하는 될 수록이면 곁에 두고 자주 머리를 맞대고 정책을 펴고자 하지만 세종은 아끼는 그를 자신과 가장 먼 곳으로, 그것도 모두가 꺼려하는 곳으로 보낸 것이다. 나는 이런 세종대왕의 면모에 너무나 놀랐다. 현 시대의 수뇌라고 할 수 있는 대통령은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과 코드가 통하는 이른바 ‘코드인사’에 여념이 없는데 반해 필요한 곳에 적임자를 보내는 세종의 인사정책은 참으로 신금을 울리게 한다. 그리고 세종의 깊은 뜻을 알아차리고 그 자리를 맡아 최선을 다하는 김종서 역시 시대에 상관없이 매우 귀중한 관료라고 할 수 있겠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이덕일, , 김영사, 1999.
(세종대왕과 김종서에 관한 전반적인 일화)
인터넷 참고 SITE, 네이버 백과사전 (김종서의 프로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