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위기의 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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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생태위기의 극복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생태위기의 극복
1. 서론
‘생명이 생명을 먹는 이치는 눈에 보이는 질서에 대한 국소적인 관찰만으로는 결코 명확히 알 수 없어요. 그것은 먹이 사슬을 통한 눈에 보이지 않는 무궁한 전체 우주생명의 끝없는 자기 조직화 과정이요, 기의 전이, 유통 순환과정이며, 먹음으로서의 수렴과 먹힘으로서의 확산의 반복을 통한 끝없는 차원 변화의 영성적인 유기화 과정입니다. (중략) 자연 생태계의 먹이 사슬은 이 종자의 중심까지 파괴하는 순환체계는 아닙니다. 오직 인간만이 다른 생명체를 멸종시키며 배불리 먹고 나서도 더 많은 여분을 약탈 착취하여 쌓아놓는 것입니다.’ 김지하, 『생명과 자치』, 솔, 1996, 77면 인용
환경오염이 심화되어 전지구적 멸망의 사태가 예견되는 시점에 이르자 생태에 관한 문제에 보자 진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인간은 끝없는 욕심으로 필요한 자원 이상으로 부를 축적하고 이용하려고 하였으며, 그 결과로 자신들의 터전인 지구가 위협을 받고 이러한 위협의 최종 목적지는 인간이 될 것이라고 인식하자 이에 대한 해결책을 강구하기 위함이다. 생태 위기의 주범으로 인식되는 것은 단연 ‘인간’이다. 이러한 오명을 쓰게 된 이유로 인간 중심적 사고, 정복 지향적 사고 등의 원인들이 제시되고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상호주관성을 인식하여 다른 생태계와 동등한 입장에서 조화를 이루어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한 가지 의문이 드는 것이 있다. 과연 인간이 다른 생태계의 생물들과 조화를 이루어 나아가는 동등한 존재라고 한다면 유달리 인간이 생태계를 위협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또한 이러한 상호 조화로운 시스템을 깨뜨릴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인간의 이러한 행위도 고도의 계산된 자연계의 순환과정이지 않을까. 즉, 인간의 이러한 행위에 의해 현존하는 모든 생명체가 멸종하고 나중에 더 나은 생명체가 나타나지는 않을까하는 공상이다. 아니면 인간이 위협을 느끼고 이에 적절히 대처하는 것이 자연계의 조화를 이루어가는 과정 중에 하나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찌됐든 이에 대한 답을 알기 위해서는 제3자로서 생태계의 미래를 관조하는 것이 유일한 방안일 것이다. 그러나 이를 관조하고 지켜보기에는 인간의 생명이 너무 짧다. 또한 이를 관조하여 알아내는 것은 유익하지도 않을 것이라 본다. 기차간에서 지루함을 달래고자 읽는 백 여 패이지 되는 가벼운 책에 적혀 있을 법한 정도의 흥밋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위에 적어 놓은 인용문으로 돌아가자. 정말로 인간만이 욕심 많은 배부른 짐승인가. 오직 인간만이 다른 종들을 멸종시킬 수 있는 여력을 가진 존재인가. 질문의 범위를 줄여 놓으면 답은 간단히 나온다. 가능하다. 인간은 지구의 모든 대륙을 초토화할 수 있는 핵무기를 가지고 있으며, 북대서양에 넘쳐나던 ‘대구’를 모두 잡아들여 이제는 자연적으로 회복이 불능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이것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최근에 한창 논쟁거리가 되었던 강입자가속기의 개발이 근거가 될 것이다. 강입자가속기의 가동 중에 미니 블랙홀이 생성될 수 있다고 한다. 미니 블랙홀이 생성된다면 수 초, 어쩌면 생각보다 빨리 지구는 미니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이다. 물론 매우 희박한 가능성이라고 한다. 운 나쁘게 미국산 소고기를 먹고 광우병에 걸릴 확률에 비교하겠냐마는, 이러한 문제를 오직 확률의 문제로 덮어버리기에는 예견될 문제의 심각성은 대단하다. 어쨌거나 지구 자체가 사라진다면 오랜 세월을 두고 관조할 대상조차 잃어버리는 것이다. 한편으로 인간이라는 존재가 대단히 경이롭기까지 하다.
이러한 경이로운 인간을 놓고 생태계를 논의할 때, 다른 자연물과 대등한 입장에 놓인 하나의 생명체, 하나의 종으로 보는 것은 아이러니다. 인간 중심주의적 사고에 빠져 범한 우와 반대되는 다른 측면에서의 우를 반복하여 범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인간은 다른 생물들과 분명히 다르다.’는 전제 하에서 논의를 해야 올바른 대안이 나올 것이다.
2. 생명에 대한 관점
생명의 사전식 정의는 영양을 섭취하여 에너지를 자아내고 성장하게끔 하는 특징이라고 한다. 네오다윈주의자들은 생명을 특정한 유기 화학물에 성장과 자기 복제 능력을 부여하는 능력을 지닌 것이라고 본다. 지구 생리학자 러브록류는 경계를 가진 체계로서 에너지나 물질의 출입이 가능하고 외부 조건의 변화와 관계없이 내부 조건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능력을 가진 것이 생명이라고 한다. 한편 김지하는 생명을 실체가 아닌 생성이라고 본다. 이는 변화를 기본으로 하며, 이러한 변화 속의 조화로 보는 것이다. 김지하, 『생명과 자치』, 솔, 1996, 35-37면 참조.
이는 생명체든지 무생명체든지 모든 것은 변화의 과정에 참여하는 것으로 존재의 의미를 갖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들은 현재 우리가 처해있는 환경오염의 해결책으로써 갖고자 하는 기본 전제를 제공하지 못한다고 본다. 생태계 위협에서의 생명이란 그러한 위협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할 이유를 제시해 주어야 하며, 그러한 위협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 있는 존재임을 보여주어야 한다. 생명체의 대사활동 또는 유전활동이 어떠한지, 또는 생명이란 주변과의 조화로운 상태라는 현학적인 논의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본다. 분명한 것은 동양의 역 사상이 어떠하든지 또는 기(氣)의 운용이 어떠하든지 상관없이 우리 인간이 사는 지구에서 인간은 중대한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는 것일 것이다. 그러한 조화로운 상태를 인간은 무의식 중에 깨뜨렸고, 인간은 더 이상 무의식적인 조화 또는 기의 운용에 기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인간은 힘이 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이는 칼을 든 아이의 형국이다. 인간의 힘은 거대하지만 그러한 힘이 어떻게 사용될 수 있을지를 모르고 있다. 지금의 모습을 어떠한 상황에 비유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적어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이가 그 칼에 의해 상처를 입었다는 것이고, 그 상처는 자연적으로 방치하여 아물 수 있는 정도의 경미한 상처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바라고 싶은 것은 그 상처가 대단히 심각하지 않아서 그 아이가 스스로 치료하고자 한다면 치료할 수 있는 상태였으면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러한 논의는 불필요한 허우적거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생존의 필요성이라는 관점에서의 생명이란 살아남고자 하는 본능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올바를 것이다. 살고자 하는 본능 또는 번식을 하고자 하는 본능은 유전자를 유지하고 영속해 나가려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단순히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유전자를 보존하고자 하는 모든 행위들이 생명의 활동이라 볼 것인가. 생명이란 무엇인가 고귀한 것이라는 바람대로라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아주 작은 미세 정보 덩어리인 유전자의 지도를 받는 것이 매우 껄끄러운 사실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를 부정할 수 있는 매우 정당하거나 확고한 근거가 있다고 볼 수도 없다. 인간은 자유로운 의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거나 또는 갖고 싶다는 것 자체로 인간이 자유롭다고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아주 작은 정보 덩어리인 유전자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 자체를 거북하게 생각하지 말고 이러한 상황의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실상 온전한 생명체의 모습들을 부정하며, 근원에 이데아적인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또한 인간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보덩어리로서의 유전자를 영속적으로 보존한다는 것은 유전자 자체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 유전자 그 자체를 영구히 보존하는 것 자체만으로는 의미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쉽다. 인간 그 누구도 아직까지 자신의 유전자를 포름알데히드로 보존하려는 시도를 한 적은 없다. 적어도 이를 간절히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이로써 유전자에게 있어서는 유전자 자신 자체를 보존하고 싶어 하는 욕구는 없을 것이라 본다. 대신에 유전자에 의해 발생한 생명체가 환경에 적응하여 잘 살 수 있는 모습으로 보여주기 위한 역할을 한다고 보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결국 유전자의 이러한 숨겨진 공을 두고 오히려 유전자가 인간 또는 생명체를 지배하려고 한다는 오해를 하고 불쾌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유전자의 역할 그리고 생명활동이란 생태계에서 생명활동을 온건히 해 나가고자 하는 것이라 보는 것이 적합하다고 본다. 환경오염에 따른 인간의 각성도 자신의 생명활동을 온건히 하고자 하는 일련의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아무리 텔레비전에서 이 땅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자손에게서 빌린 것이라고 구호를 외치더라도 그럴듯하다는 반응은 보일지라도 그 구호를 실천하려는 사람을 찾기란 어렵다. 결국 환경 위기에 대한 각성도 자신들이 살 수 있을 것이라 예상되는 하한선인 50년 위기설이 닥치고 나서야 움직이는 척이라도 하고 있다. 잠복기 10-30년 된다는 광우병에 대한 위기의식도 젊은 세대 또는 그 이상을 살 수 있을 것이라 예상되는 세대에게서나 나타나는 것일 뿐이다. 생명이란 어떠한 뜻을 세우고 이를 실천하려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생명이란 적어도 끊임없이 자신이 속해있는 환경 속에서 살아남고자 한다.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려고 하였던 것도 생명 활동이었고, 지금은 망쳐놓은 자연을 복구하려는 것도 생명활동이다. 오직 자연을 복구하려는 것만이 생명활동의 본질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연을 정복하려고 하고 망쳐놓았던 모습도 매우 자연스러운 생명활동이라고 본다.
3. 이성 활용의 정당성
본래 자연 생태계의 조화를 유지하던 보이지 않는 환경 시스템을 인간의 이성이 대체할 수 있는가가 문제된다. 이를테면 환경의 복원을 위한 기술 개발이라든지 생태계를 새로운 시각으로 보려는 시각 등의 효용성이다. 자연 그대로의 상태에서는 불필요한 행위일 것이다. 이성의 능력은 자연 전체의 조화를 담당하는 환경 시스템을 따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성 또한 거시적 관점으로 보면 환경 시스템의 일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성의 활용을 통하여 자연 시스템을 대체하려는 시도는 월권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현대에 나타나는 환경 문제는 환경 시스템의 오작동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 의한 것이다. 인간에 의해 발생한 문제는 인간에 의해 재조정되는 것이 올바르다. 환경
참고문헌
참고문헌
김지하, 『생명과 자치』, 솔,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