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초 오상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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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초 오상순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공초(空超) 오상순
1. 작가의 생애
오상순은 1984년 8월 9일 서울 장충2동에서 목재상을 경영하던 오태연의 5남매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난다. 어린 상순은 학교와 교회, YMCA를 다니며 집에선 책 읽는 것이 전부인 모범생이었다. 8세에 다니던 서당을 그만두고 어의동 학교(지금 효제 초등학교)에 입학한다. 기독교 계통의 경신학교로 진학해 신학문을 공부하던 그는 사춘기 시절 어머니의 죽음과 아버지의 재혼을 잇달아 겪는다. 일련의 시련은 상순이 가출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집을 떠나 외가에서 기거하던 그는 1912년에 일본 교토의 도시샤 대학으로 유학하여 종교철학을 공부한다. 귀국해서도 상순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교회 전도사로 일하면서 “폐허”에 가담하게 되면서 문단활동을 적극적으로 하기 시작한다. 1920년 7월 “폐허”에 ‘시대고와 희생’이란 글을 발표하면서 등단하게 되는 것이다. 이로 오상순은 1920년대에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치게 된다. 한편, 그는 계모를 들인 집안 분위기와 방랑벽 때문에 그는 대구 이상화의 집에서 지내거나 서울 광화문 근처에서 하숙생활을 하며, 그야말로 동가식서가숙의 삶을 산다.
그는 1926을 전후로 하여 불교로 전환하게 되는데 기독교 신자로 잠시나마 전도사까지 한 그가 부처님 법을 만나게 된 때는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불교중앙학림 강단에 서게 되면서부터이다. 영어교사로 재직하던 그는 영문경전을 보며 불교에 관심을 갖고 참선을 시작했고 금강산을 비롯해 명찰을 순례하며 스님들의 밑에서 정진했다. 1926년 상순은 범어사에 입산한다. 2년간 수행은 그의 사상체계를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여기서 “허무”,“공”을 깨달은 상순은 범어사를 나와 전국의 사찰을 돌아다니며 구도의 길을 걸었다.
815해방 후 그는 가족의 기대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머리를 삭발하고 “무정처”의 삶을 계속한다. 그는 명동의 “청동다방”에서 일명 “다방문학”을 했는데 1950년 625 전쟁이 터지자 오상순의 “다방문학”도 피난지 부산의 광복동 “에덴 다방”으로 옮겨가 계속된다. 오상순은 자신의 시집대신 1955년을 전후로 작고할 때까지 청동다방을 오가며 내밀었던 사인북으로 을 탄생시켰다.
그는 살아생전 시집한권 내지 않았으며 1963년 그는 지병인 고혈압에 심장병, 폐렴 등이 겹친 합병증으로 입원했다가 1963년 6월 3일 숨진다. 그는 서울 외곽 수유리에 안장되고 사후에 그를 따르던 제자들에 의해 (1963)이 발간된다. 그 외 시집으로 (1977), (1983), (1987)이 있다. 그리고 그의 유명한 논설로 종교와 예술이라는 장문의 논설에서 그는 종교와 예술은 혼연일체의 조화를 이루지 않으면 안될 쌍둥이 자매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한 가지 종교에 대해 편벽된 생각을 갖지 않는다고 하며,
“내가 지금 종교를 논할 때, 기독교의 예를 많이 드는 것은 지금의 나의 종교에 대한 지식과 이해와 친근함이 다른 종교보다 비교적 낫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이후 기독교를 떠나 불교로 돌아서게 된다.
도 있다 .
2. 문학적 특징과 주요작품
①-민족현실에 번민하는 양상
공초는 일반적으로 특별히 민족의식을 갖고 시를 쓴 시인이라 하지 않는다. 시를 쓴 것이 조국애의 표출이라고 못할 바도 아니겠으나, 그 이상으로 독립운동 같은 데에 가담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친일한 일도 없는 반면 애국에도 적극성은 보이지 않아서 해방이 몰고 온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늘 초연했던 사실로도 그것은 증명된다.
그러나, 공초의 초기 시에서도 당대 시의 매우 일반적인 경향이었던 죽음과 유토피아 상실의 절망적 이미지는 나타나고 있다. 《백조》《폐허》등의 지면에 넘쳐나는 민족현실에 대한 상실감과 그 궤를 일부는 같이 하는 것이다. 음습한 현실과 상실감은 허공과 어둠과 안개바다의 벽을 치는 젊은 ‘骨肉의 주인’(「어둠을 치는 자」,1922)의 모습은 식민 지배의 나락으로 떨어진 민족 현실에 번민하는 일련의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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