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가재 연행 일기 리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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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노가재 연행일기
1. 여행자 소개
김창업(金昌業)
1658-1721, 숙종 때의 문인으로, 자는 대유(大有), 호는 노가재(老稼齋)다. 명문집안에서 태어나, 1681년(숙종 7년)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송계(松溪 : 지금의 서울 성북구 장위동)에서 전원생활을 하였다. 1712년 형 김창집(金昌集)이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자, 그를 따라 연경(燕京)에 다녀와 기행문 를 썼다. 도학(道學)문장을 비롯한 시와 그림에도 뛰어나 산수와 인물을 잘 그렸다. 화양서원(華陽書院)에 모신 송시열(宋時烈)의 화상은 그가 그린 것을 화공(畵工)이 전사(轉寫)한 것이라고 한다. 1721년 (경종 1년) 신임사화(辛壬士禍) 신임사화 : 이미 숙종 대에 노론과 소론이 분기하여 사문(斯文)시비를 벌였으나, 경종 대 들어 왕통에 관한 시비가 본격화됨으로써 기존의 사문시비는 충역(忠逆)시비로 논지가 바뀌었다. 신임사화라는 용어는 당대부터 쓰였으나, 화를 입은 노론 측의 입장이 반영된 용어이다. 노소론 사이의 대립에 왕통문제가 개입된 것은 장희빈(張禧嬪)의 아들인 경종이 세자로 책봉되고 뒤에 왕위를 이었기 때문이다.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남인이 축출된 뒤, 노론과 소론은 장희빈의 처벌문제를 놓고 대립하였다. 노론측은 장희빈이 정비인 인현왕후를 모해하였으므로 사사해야 된다는 주장을 한 데 반해, 소론측은 다음 왕이 될 세자를 위해 장희빈을 살려야 옳다고 주장하였다. 경종은 숙종 말년에 4년간 대리청정을 하다가 숙종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노론은 경종 즉위 뒤 1년 만에 연잉군(뒤의 영조)을 세제(世弟)로 책봉하는 일을 주도하고, 세제의 대리청정을 강행하려 하였다. 노론이 이 과정에서 두 차례의 태도 변화를 보임으로써 소론측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소론측은 노론의 대리청정 주장을 경종에 대한 불충(不忠)으로 탄핵하여 정국을 주도하였고, 결국에는 소론정권을 구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신임사화는 이러한 와중에서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사건(告變事件), 즉 남인(南人)이 숙종 말년부터 경종을 제거할 음모를 꾸며왔다는 고변을 계기로 일어났다. 소론은 노론이 전년에 대리청정을 주도하고자 한 것도 이러한 경종 제거계획 속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하였다. 고변으로 인해 8개월간에 걸쳐 국문이 진행되었고, 그 결과 김창집(金昌集) ·이이명(李命) ·이건명(李健命) ·조태채(趙泰采) 등 노론 4대신을 비롯한 노론의 대다수 인물이 화를 입었다. 이 옥사는 노소론간의 대립이 경종 즉위 후 왕에 대한 충역 시비의 형태로 표출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으로서, 그 자체는 경종대의 문제였지만, 그에 대한 평가 문제는 영조대에 탕평책(蕩平策)이 추진되는 과정에서도 논란이 계속되었다.
로 형 창집 등 노론(老論) 4대신이 유배되자 울분을 못 이겨 병사하였다. 그 밖의 문집에 이 있고, 그림으로는 가 전해진다.
2. 여행기 작성 경위
1712년 동지사겸 사은정사(冬至使兼 謝恩正使)이자 저자의 큰 형인 김창집이 청나라의 사신으로 연행하게 된다. 당시 사행 인원에는 사신들의 친족 중 한 명이 무관 등의 명목으로 배행(配行)할 수 있었는데, 이때 김창업이 자제군관(子弟軍官)으로 사행(使行)에 참여했다. 노가재 연행일기는 이런 김창업이 1712년(숙종 38) 11월 3일 경성(京城)을 출발하여 12월 27일 북경(北京)도착, 다음해 3월 30일 경성(京城)으로 돌아올 때까지 매일의 사건을 기록한 연행일기이다. 척화신(斥和臣)인 김상헌(金尙憲)의 종손(從孫)으로서, 청(淸)을 이적국가(夷狄國家)로 보는 입장에서 일기를 적었다.
3. 여행기 필사 및 출판 상황
★ 김창업이 여행을 하던 당시의 청과의 관계
김창업이 연행했던 18세기 초(1712년)는 청나라 제 4대 강희제(康熙帝)가 위에 오른 지 51년이 되는 청나라의 전성기였다. 더구나 바로 이 1712년은 백두산 정계비를 세워 두 나라 사이의 경계를 확정하고, 사행의 예단(禮單)과 국경을 넘는 조선 사람의 사의(査議)를 감면하는 새로운 외교 관계를 정립한 획기적 관계 개선의 해였다. 따라서 이 임진사절(壬辰使節)은 이런 두 나라 사이의 관계 개선과 함께, 파견 사행의 회수와 연례공물(年例貢物)을 줄여서 시행하는데 대한 사은(謝恩)과 절사(節使)에 목적이 있었다.
원래 사신은 청에서 정해준 행로를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청과의 관계가 한창 호전될 때였고, 김창업은 자제군관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더욱 더 자유로운 기행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출판될 당시의 상황
노가재 연행일기는 출판된 후, 같은 18세기의 홍대용과 박지원은 물론, 다음 19세기의 김경선까지가 모두 이 책으로 중국과 중국여행에 대한 교양을 넓히고 또 연행의 필수 안내서로 여장 속에 휴대한 책이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일기 속에 노가재의 기록을 화두로 경치를 논의하고 그 견문의 우열을 논하며, 자기들의 여행의 체험을 부연해 갔다.
4. 여행 일정 정리
구련성(11/26) 금석산 사둔지(27) 책문 봉성(28) 건자포 송점(29) 팔도하 통원보(30) 답동 연산관(12/1) 회령령 첨수참(2) 청석령 낭자산(3) 냉정 신요동(4) 난니보 십리보(5) 백탑보 심양(6~7) 대방산 고가자(8) 소황기보 백기보(9) 이도정 소흑산(10) 중안 신광녕(11) 여양역 십삼산(12) 대릉하참 소릉하참(13) 송산보 고교포(14) 연산역 영원위(15) 사하소 동관역(16) 사하참 양수하(17) 중전소 산해관(18) 봉황점 유관(19) 배음포 영평부(20) 이제묘 사하역(21) 진자점 풍윤현(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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