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가재 연행일기 -연행일기를 통해 생각해보는 대청의식과 대조선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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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노가재 연행일기
부제: 연행일기를 통해 생각해보는 대청의식과 대조선의식
(Ⅰ) 공통사항
1。노가재 김창업(金昌業)
저자인 김창업은, 자는 대유(大有), 호는 가재(稼齋), 또는 노가재(老稼齋), 본관은 안동(安東), 이른바 안동김씨(安東金氏) 가운데서도 대표적 명문의 일원으로 태어났다(효종9, 1658). 증조부는 인조(仁祖) 때 유명한 척화(斥和) 대신이요, 명필이기도 하였던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아버지는 숙종(肅宗) 조의 영의정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장형 창집(昌集)은 호가 몽와(夢窩)로 역시 숙종조의 영의정, 중형 창협(昌協)은 호가 농암(農巖)인데 여한 8대가(麗韓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는 유명한 문장가(文章家)이며, 삼형 창흡(昌翕)은 호가 삼연(三淵)인데 창협과 더불어 대학자로서 명성이 높았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천성이 총명하였으며, 어려서부터 문사(文辭)에 능하였고, 특히 시를 잘 지었다 한다. 그는 24세때인 숙종 7년에 진사가 되어 명가의 자제로 벌써 이름이 높았으나, 가세가 너무 번성함을 꺼려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한다. 성격이 청아하면서도 호협하여 부귀 공명을 멀리 하고, 동교(東郊)인 송계(松溪)에 물러나 전장(田莊)을 다스리며 일생을 마치고자 하여 스스로 가재(稼齋)라 호하였다 한다. 만년에 장형 창집의 지위가 높아 가자 도리어 불안감이 더하여, 막내 아들 신겸(信謙)이 대과(大科)에 오르는 것을 막기까지 하였다 한다. 이윽고 경종(景宗) 2년(1722)에 창집이 정변을 다하여 거제로 귀양가자 울분이 겹치고 신병이 악화되어 64세로 졸하였다 한다. 이장우 해제「燕行錄選集」Ⅳ, 민족문화추진회, 1975
그 역시 형제들과 병칭되는 유명한 문장가였을 뿐 아니라, 화가로서도 이름이 높았다. 현존하는 그의 그림인 「추강만박도(秋江晩泊圖)」나 후인이 모사한 「송시열 77세상」 등의 작품으로 그의 높은 그림솜씨를 짐작할 수 있다. 그의 그림에 대한 취향은 서자인 윤겸(允謙)에게 이어져 조선 후기에 유행한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畵)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그가 북경에 내왕한 것은 55~56세 때로 중국 산천을 보지 못한 것을 늘 아쉽게 여기던 차 1712년 연행정사(燕行正使)인 장형 창집을 따라 나선 것으로 이 때 보고 들은 것을 모아 『가재연행록(稼齋燕行錄)』을 펴내었는데, 이 책은 중국의 산천과 풍속, 문물제도와 이 때 만난 중국의 유생, 도류(道流)들과의 대화를 상세히 기록하여 역대 연행록 중에서 가장 좋은 책의 하나로 손꼽힌다. 그 밖의 문집에 《노가재집》이 전한다. 『한국인명대사전』, 신구문화사, 1976
2。연행일기(燕行日記)
金昌業(朝鮮)著. 9卷 6冊 筆寫本 30×19.8cm.
①창작 연대와 창작경위
이 책은 숙종38년(강희51, 1712) 임진년 동지사 조선시대에 명(明)나라와 청(淸)나라에 정기적으로 파견한 사신. 대체로 동지(冬至) 절기를 전후하여 보냈으므로 동지사라 하였다.
겸 사은사 조선시대 중국 명나라와 청나라에 보냈던 답례 사신. 정기적인 사신이 아니라, 명나라와 청나라가 조선에 대하여 은혜를 베풀었을 때 이를 보답하기 위하여 수시로 파견한 임시사절이다.
(冬至使謝恩使) 김창집의 타각(打角) 직명의 하나. 중국에 가는 사신 일행의 모든 기구를 감수(監守)하는 사람
으로 북경에 다녀온 김창집의 아우 노가재 김창업의 연행기록으로서, 이미 55세의 노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군관의 행색으로 연행 길에 오른 것은 그의 평소 중국에 대한 절실한 관심의 소치로 보인다.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중국은 학문적 문화적 흥미의 대상이었을 뿐 아니라, 문헌적인 연구뿐만 아니라 직접 답사에 오르는 것이 하나의 소망처럼 여겨지던 시기였다. 이러한 측면에서 명문가의 자제로 쉽게 연행 길에 오를 기회를 얻었던 김창업의 중국에 대한 생각 역시 당연한 사항이었으며, 그 전부터 갖추고 있던 중국에 대한 많은 식견과 지식이 본서에서 자신이 읽었던 여러 연행록의 기록과 실제 목격 장면의 비교 등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