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어진 기생 그리고 기생에 대한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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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만들어진 기생 그리고 기생에 대한 기억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만들어진 기생, 그리고 기생에 대한 기억
1. 서론 : 기억과 이미지 형성의 한 사례로서 일제강점기의 기생
우리 시대에 기생에 대한 기억은 복합적이다. 매매춘의 역사에서 한 축을 차지했던 집단으로 생각되는가 하면 최근 들어서는 방송이나 서적 등의 매체를 통해 ‘예인’, ‘종합 예술인’ 의 성격이 크게 부각되기도 했었다. 기생은 옛 남성 중심 사회에서 그들의 성적 대상인 것으로 여겨지는 데에서부터 오히려 남성들을 자유자재로 조롱하고, 그들보다 뛰어난 문학적 능력을 가진 황진이와 같은 주체적인 여성의 모습까지 양 극단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보통 ‘품격 있는 예인’으로서 기생이 식민지 시대를 거치며 일본에 의해 그 이미지가 타락, 왜곡되었다는, 다소 간단한 구도의 주장이 이러한 다양한 이미지가 생성된 원인으로 많이 이야기되는 듯하다. 그렇다면 과연 조선시대의 기생은 전적으로 품격 있는 예술인에, 주체적인 여성 집단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러나 과거 어느 사회적 실체의 모습을 온전히, 객관적으로 복원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며 대부분의 경우 그 모습은 복합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이 문제는 한쪽으로 단정내리기 어렵다. 조선시대에 이미 기생은 일패, 이패, 삼패의 구분을 두어 일패기생은 황진이와 같은 인텔리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으나 이패나 삼패 기생들은 매음을 행하였고 기생에 대한 수요층 역시 삼패로 내려올수록 더욱 낮은 신분층을 포괄하였다. 따라서 삼패 기생들까지 넓은 범주의 기생에 포함시킨다면 기생과 창기가 다 같은 ‘기생’의 범주에 묶일 수 있는 여지도 존재한다. (주영하, 『음식전쟁 문화전쟁』, 사계절, 2000년, 230쪽 참조)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과연 기생이 어떤 집단이었느냐는, 그 실체를 밝히는 것보다는 그에 대한 기억과 이미지가 형성되는 과정 자체에 초점을 맞춰보고자 한다.
물론 어느 시대, 어느 때에나 그보다 앞선 과거에 대한 기억은 끝없이 생산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생에 대한 이미지가 인위적으로 형성되고 사람들이 단순히 그에 대한 묘사를 넘어, 과거에 대한 기억으로 기생을 기록하기 시작한 시점은 일제 강점기 즈음부터라 할 수 있다. 왜 이 시기에 와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일까? 당시 한반도는 일본이라는 제국주의 열강의 간섭과 지배로 인해 급작스럽고 강제적인 근대화의 과정을 거쳤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은 사회전반에 많은 변화를 일으켰는데 기생과 관련된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근대화의 물결 속에 기생이라는 집단은 이전과 다른 사회적 맥락에 놓이게 되었고 이 변화 과정 속에서 일본정부나 일본인, 조선인들은 각각의 목적과 시각에 따라 기생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거나 기억을 기록해갔다. 이 시기에 보이는 많은 모습들은 한 사회적 존재에 대한 기억과 이미지가 어떻게 형성되어 가는지를 드러내는 매우 좋은 사례로, 따라서 여기서는 먼저 일제강점기에 초점을 맞춰 기생이 처한 사회적 변화의 모습을 언급한 다음, 이에 대한 일본 정부, 일본인과 조선인들의 이미지 형성과 기생에 대한 그들의 시선, 기억을 차례로 살펴볼 것이다.
2. 기생이 처한 사회적 변화의 양상
본래 조선 시대의 기생은 기본적으로 ‘관기 제도’에 그 바탕을 두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공사 노비제가 폐지되면서 궁중과 지방 관아의 관기 300여명이 해고되었고 1905년, 1907년을 거치면서 여악, 내의원 등도 폐지되어 기생들은 민간으로 나아가 일을 하게 되었다. 1908년 경시청령 5호로 발표된 ‘기생단속령’은 모든 기생들이 조합에 가입한 후 영업 인가를 받도록 함으로써 기생은 국가의 관리 하에 들어가게 된다. 동시에 발표된 경치청령 6호는 ‘창기 단속령’으로 두 법령은 ‘기생’과 ‘창기’의 단어만 다를 뿐 내용은 완전히 동일했으며 일본은 일본인 거류지역을 중심으로 유곽을 설치한 후 이들을 관리하여 공창제적 매춘제도를 도입하였다. 그리고 일제 식민지배가 시작된 이후 조선총독부는 ‘숙옥영업취체규칙 (宿屋營業取締規則)’등의 법령을 통해 기생, 작부, 창기 등의 구분을 통해 각각의 영업 내용과 장소를 지정하고 통일적인 관리를 시행하였고 일제 시기 내내 통제와 규제를 중심으로 정책을 시행해 나갔다.
기생 단속령이 시행된 이후 기생들은 그에 맞게 조직화하였다, 1909년 이후 한성 창기 조합을 비롯한 여러 조합들이 설립되었고 이들은 1914년 이후 ‘권번’이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바뀌게 된다. 조합과 권번은 기생의 교육을 담당하였고 기생을 필요로 하는 요릿집과 기생을 연결해주는 중간 다리였으며, 동시에 경찰이 기생을 통제할 수 있는 관리 단위로써의 역할을 했다. 그런데 기생 사회의 변화는 단지 이러한 표면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관기제도가 없어지고 민간 영역이 삶의 터전이 됨에 따라 ‘창기’가 늘어나게 되었고, 기생들의 삶의 공간이 요릿집과 극장이라는 상업적인 유흥공간을 중심으로 자리 잡은 것은 그들에게 ‘고유한 기예 레파토리를 유지함으로써 전통시대 상층부 문화의 미적 기준을 유지했던 예인의 입지보다는 상업적 놀음 공간의 접대부로서의 이미지를 더욱 강화하게’ 서지영(2006), “식민지 시대 기생연구 Ⅱ : ‘기생조합’의 성격을 중심으로” 『한국고전문학여성연구』, 438쪽
하였다. 또한 ‘여급’이 성적 유희를 제공하는, 카페와 같은 근대적인 유흥공간들이 기생의 자리를 위협해갔고 이에 기생들은 이들을 견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들의 모던적 요소를 모방하고자 했다. 윤혜신(2006), “일제시대 ‘기생 저급화 담론’ 에 대한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미간행, 35쪽
따라서 1920년대 후반부터는 양장에 구두를 신고 레뷰공연 보통 일련의 촌극(寸劇), 노래, 춤, 모놀로그 등 여러 종류의 오락거리를 다양하게 구성한 일종의 뮤지컬과 같은 연극 형태를 의미한다.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한국현대문학대사전)
을 하는 ‘모던기생’이 출현했고 한편으로는 까페 여급으로 직업을 바꾸기도 하여 기생과 여급사이의 구분이 흐려지는 측면도 존재했다. 윤혜신(2006), “일제시대 ‘기생 저급화 담론’ 에 대한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미간행, 36쪽
따라서 이 시기에 대해서는 ‘기생이 저급화 되었다’, ‘기생이 윤락녀로 전락하였다’는 소위 ‘저급화 담론’이 존재한다. 위와 같이 기생과 창기, 기생과 여급의 구분이 희미해지고 기생들이 단순한 접대부로 취급받음에 따라 이전의 ‘예인’으로의 이미지를 상실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는 일제시대 ‘근대성’에 기반을 둔 위생담론의 등장과 이에 따른 위생관리의 시행으로 기생들이 잠재적 성병 보유자로 취급받아가는, 따라서 정기적인 검진을 받아야하고 나아가 위생상의 이유로 ‘기생철폐론’까지 등장 ‘기생철폐론’은 1931년 동광 지에서 실시한 ‘성에 관한 문제의 토론’이라는 앙케이트를 통해 대표적으로 확인 가능하다. 기생제도 철폐 여부에 대해 당대 사회 지도층, 지식인 계층으로 이루어진 14명의 앙케이트 대상은 모두 찬성했으며 이들은 윤리적이면서도 위생상의 이유를 그 근거로 들고 있다. ( 이경민, 『기생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사진아카이브연구소, 2005년, 71-72족 참조)
하는 상황과도 맞물려 있다. 그리고 일부는 여기에서 일제의 역할을 강조한다. 그들은 일제의 법령들이 내포한 의도 - 예를 들어 ‘기생단속령’과 ‘창기단속령’은 그 내용이 완전히 동일하여 사실상 기생과 창기의 동일시를 추구했다는 - 나 위생 담론의 확산을 통해 기생이 일제에 의해 불결한 존재로 격하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기생사회의 변화를 촉발한 시작이라 할 수 있는 관기해방은 근대화 시도의 한 부분인 신분제도 철폐로 인해 일어난 사건일 뿐 기생 사회의 저급화를 겨냥해 추진된 정책은 아니었다. 또한 기생과 창기 명칭에 대한 정의가 엄격히 나뉘고 당시 기생과 창기는 계급을 달리하기 때문에 제각기 단속령을 발표했다고 하며 경시총감부는 둘의 정의를 명확히 구분하고 있다. (윤혜신(2006), “일제시대 ‘기생 저급화 담론’ 에 대한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미간행 25쪽)
강제 성병검사의 경우에도 기생에 대한 시행은 창기에 비해 더 늦게, 덜 엄격하게 시행된 점을 생각해보면 ‘기생단속령’과 ‘창기단속령’의 내용이 동일하다고 두 집단이 실제로 완전히 동일한 대우를 받았다고 보기에는 힘든 부분이 있다. 따라서 기생의 이미지 형성에 있어서 일제의 개입은 이보다는 다음에서 언급될 ‘식민지 민속학의 대상으로서의 기생’이라는 측면에서 더욱 주목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국내문헌
김영희, 『개화기 대중예술의 꽃, 기생』, 민속원, 2006년
박지향, 『제국주의』,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0년
이경민, 『기생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사진아카이브연구소, 2005년
주영하, 『음식전쟁 문화전쟁』, 사계절, 2000년
외국문헌
가와무라 마나토, 『말하는 꽃, 기생』, 유재순 역, 소담출판사, 2002년
논문
서지영(2006), “식민지 시대 기생연구 Ⅱ: ‘기생조합’의 성격을 중심으로” 『한국고전문학여성연구』 10권
서지영(2009), “표상,젠더, 식민주의: 제국 남성이 본 조선 기생”, 『아시아여성연구』 48권
윤혜신(2006), “일제시대 ‘기생 저급화 담론’ 에 대한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미간행
이상현(2008), “일제강점기 ‘무대화된 민속’의 등장 배경과 특징”, 『비교민속학』 35권
정혜영(2007), “근대의 성립과 기생의 몰락: 근대 문학에 나타난 기생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한중인문학연구』 20권
이들의 경우는 아름다운 과거의 기생/ 변화된 당대의 기생 이라는 구분법을 사용하기 보다는 사회적 약자이면서도 사회악적인 존재로써 기생을 상정하기 위해 당시 기생의 봉건성, 위생성의 측면에 대한 비판에 더욱 집중했다, 즉 조선 지식인 여성들에게 ‘과거의 기생’에 대한 기억은 구체적으로 거론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6. 결론 : 현재 우리 기억의 기원으로서 일제 강점기의 시각들
지금까지 일제강점기를 중심으로 기생이 겪은 변화의 모습과 일본인, 조선인들의 기생 이미지 형성, 그리고 기생에 대한 기억과 시각 등을 살펴보았다. 이 사례에서 기생이라는 역사적이자 현재 존재하는 실체에 대한 이미지와 기억이 형성되는 주요인으로는 크게 그에 대한 제국주의의 필요성과 근대화로 인해 기생이 여러 가지로 변화를 겪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때 특징정인 점은 일본 정부나 민간에서의 조선인, 일본인들 모두 이미지, 기억 형성과정에 있어서 조선의 기생이 가지는 고유성, 전통성을 활용했다는 것이었다. 기생이 조선의 고유한 전통이었다는 사실은 그를 통해 조선 자체의 이미지를 대변하는 방향으로도, 자신들의 의도에 맞게 그 과거의 고유성이란 권위에 의존하는 방향으로도 기생이 사용될 수 있게 하는 힘이었다.
일제 말기 태평양 전쟁을 이유로 기생의 활동이 금지되었고 독립 이후에도 기생이 사실상 그 명맥을 완전히 상실함에 따라 기생은 완전히 과거의 대상으로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서론에서 언급했듯이 현재 우리가 기생에 대한 기억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다. 이에 대해 단순히 일제가 기생의 이미지를 타락시켰다는 주장이 많이 이야기되곤 하지만 실제 일제 강점기 기생에 대한 이미지 형성과 기생을 바라보던 시각, 과거 기생에 대한 기억은 상당히 복합적이었다. 비록 제국주의 남성의 목적에 따른 시각이었다 해도 조선의 기생을 예인이자 품격 있는 집단으로 바라보는 관점은 일제시대에도 존재했고 기생을 불결한 존재, 창기와 다름없는 집단으로 보는 시각은 조선인 내부에서도 존재했다. 따라서 일제만을 기생에 대한 이미지 형성과 기억 형성의 주체로 보는 것은 오히려 당시 분출된 수많은 시각들을 무시하는 처사이며 일본에게만 기생이미지 저급화의 죄를 씌우는 것은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그보다는 오히려 현재 우리가 조선의 기생에 대해 가진 다양한 시각 전반이 이 당시 상황의 변화에 따라 뿜어져 나온 여러 입장과 기억에서 그 기원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다.
*그림자료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의 포스터
조선총독부철도국에서 펴낸 표지사진으로 기생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처 럼 관광홍보를 위해 조선의 인상으로 대표된 것이 바로 기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