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과 인재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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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세종과 인재경영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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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장영실은 자신의 신분만으로는 정 5품이라는 관직에 오르지 못할 인물이었다. 하지만 세종에게는 인재가 필요하였고 장영실은 그런 세종에게 숨은 보석이었다.
『안승선에게 명하여 영의정 황희(黃喜)와 좌의정 맹사성(孟思誠)에게 의논하기를, "행사직(行司直) 장영실은 그 아비가 본디 원(元)나라 소항주(蘇杭州)사람이고, 어미는 기생이었는데, 공교(工巧)한 솜씨가 보통 사람에 비해 뛰어나므로 태종께서 보호하시었고, 나도 역시 이를 아낀다. 임인·계묘년 무렵에 상의원 별좌(尙衣院 別坐)를 시키고자 하여 이조판서 허조와 병조판서 조말생에게 의논하였더니, 허조는 기생의 소생을 상의원에 임용할 수 없다.고 하고, 조말생은 이런 무리는 상의원에 더욱 적합하다.고 하여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하지 아니하므로 내가 굳이 하지 못하였다가 그 뒤에 다시 대신들에게 의논한즉, 유정현 등이 상의원에 임명할 수 있다.하여 내가 그대로 따라서 별좌에 임명하였다.
장영실의 사람됨이 비단 공교한 솜씨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질이 똑똑하기가 보통에 뛰어나서 매양 강무할 때에는 나의 곁에 가까이 모시어서 내시를 대신하여 명령을 전하기도 하였다.』
또 이 글은 장영실의 출생과 그가 관직에 등용되기까지의 과정에 대하여 기록된 「세종장헌대왕실록」권 61에 수록된 내용이다.
장영실이 역사의 기록에 처음 등장한 것은 태종 재위 12년(서기 1412년)으로 그 즈음에 이미 궁중에서 일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미 태종대부터 전문 기술자로 활동했던 장영실은 세종 재위 3년(서기 1421년)에 천문기구 제작을 연구하기 위해 중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때 벌써 조선 최고의 과학 전문 기술자로 인정받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국가의 대 사업이었던 천문기구 제작에 천민출신 기술자를 포함 시켰다는 점에서 세종의 현실적이고 진보적인 경영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당시 중국으로 유학을 간 장영실은 천문기구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지만, 개괄적이고 원론적인 이론 정도를 알아올 뿐 실제 천문기구를 제작하는 실질적인 설계도는 구해오지 못한다. 당시에는 천문이 가장 중요한 과학 분야였으므로 다른 나라에 그 기술이 유출되지 않도록 철저하게 통제했기 때문이다. 장영실이 중국에서 돌아오자 세종은 그 공로를 인정하여 효율적으로 천문기구를 제작할 수 있도록 왕실에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는 상의원 별좌에 그를 임명하려 했으나 계급사회에 몸담고 있는 중신들의 반대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한다. 하지만 장영실이 세종 재위 6년(서기 1424년)에 수동 물시계인 경점기를 고쳐 보완해 내 그 공로를 인정받아 결국 상의원 별좌에 임명한다. 신분의 높고 낮음이 분명하던 그 시기 장영실 같은 출생의 인물이 왕을 가까이서 보좌하는 직책을 맡았다는 것은 그 시기 신분제도가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경직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 시기가 세종대였고 아직은 조선 초기라는 점에서 세종의 과감했던 인사결정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장영실의 연구가 어느 정도 단계에 이르자 세종 재위 14년(서기 1432년)부터는 천문 관측 기구 제작을 위한 대규모 사업이 시작되었다. 천문 관측기구와 현실에 맞는 수시력의 제작은 농업 국가인 조선에게 있어서 시급한 사안이었다. 세종은 집권 초부터 이에 대한 관심을 잊지 않고 있었고 장영실의 연구가 그만큼 성장하자 이를 국가의 대안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세종은 그 해 가을부터 예문관 제학 정인지에게 총지휘를 명하여 천문대와 그곳에 필요한 각종 천문기구를 제작하는 의표창제사업에 착수하게 하였다. 우선 천문 관측 관청인 서운관을 확장하고 대규모 천문 관측대인 대간의대를 경복궁 안에 건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규모 천문 관측대인 소간의대도 북부 광화방 부근에 함께 짓도록 하였다. 또 각종 기구 제작 사업에는 공조참판을 역임한 무관이자 뛰어난 과학자였던 이천이 실무책임을 맡아 진행하였으며 물론 장영실도 이 사업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먼저 나무로 오늘날의 각도기와 비슷한 간의를 만들어 한성의 위도를 새로 측정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구리로 여러 가지 기구를 제작하였다. 작업에 착수한 지 1년 만에 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는 일종의 천문시계인 혼천의를 만들었다. 혼천의는 관측용과 실내용 혼천시계의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 「세종실록」에 의하면 이때 장영실이 만들었던 것은 실내용 혼천시계로 보인다. 이 혼천의는 세종 14년(1432)에 시작된 여러 천문의기 제작사업 중에서 가장 먼저 완성을 본 의기였으며 간의(기능이 많아지고, 구조가 복잡해 진 혼천의에서 적도환, 백각환, 사유환의 세 고리만을 떼어 간략히 만들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임) 등 다른 많은 의기들의 모태가 된 기구이다. 이 혼천의 제작은 쉬운 것이 아니었다. 세종은 혼천의의 완성을 위하여 세종 3년(1421)에 장영실과 윤사웅을 명(明)에 파견하였고, 세종 13년(1431)에는 수학자를 명에 파견하여 그 기술을 습득해 오게 하였다. 그러나 당시에 천문학적 지식이나 기술은 다른 어떤 분야의 무엇보다도 중요한 분야였던 까닭에 이들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장영실을 비롯한 일행은 기기들의 목적과 성능 그리고 구조만을 보고 온 후 자신들의 기술을 총 동원하여 만들었다. 그러므로 이 혼천의는 중국의 기술적 영향과 우리 고유의 과학적 전통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기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장영실은 독자적으로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 주는 물시계인 자격루를 만들었다. 세종은 장영실의 자격루가 정확하게 작동하는 것을 크게 치하하며 그를 정4품 무관 벼슬인 호군으로 임명했다. 장영실은 이미 연구 도중에 정5푸 무관 벼슬인 행사 직 으로 임명되었는데, 자격루의 완성으로 또 한 번 승진한 것이다.
세종(世宗)은 경복궁 경회루 남쪽에 보루각을 짓고 그 안에 자격루를 설치하여 이듬해(서기 1434년) 7월 1일부터 조선의 표준 시계로 사용하게 했다. 자격루는 보루각에 설치되었다고 하여 보루각루라고 부르기도 했고, 임금이 거처하는 궁궐 안에 있다고 해서 금루라고 부르기도 했다. 보루각의 자격루에서 시간을 알려주면 궁궐 밖 종루에서 오정(낮 12시)나 인정(밤 10시경) 등의 시각을 북이나 종을 쳐서 일반인들에게 알렸다. 보신각 옆으로 나 있는 서울의 종로 거리가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여기에서 유래했다.
장영실이 만든 자격루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현재 남아있는 것은 1536년에 숭례문과 흥인문에서도 시간을 알려주기 위하여 추가로 만들어진 것이다. 중종 대에 새로 만들어진 자격루는 창경궁 안에 새 보루각을 짓고 그 안에 설치하였는데, 고종 대에 시간을 알리는 방법이 바뀌자 일제가 보루각을 헐고 자격루만 장서각 앞에 방치해 두었던 것을 현재 덕수궁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장영실은 자격루를 만든 지 5년 후인 세종 재위 20년(서기 1438년)에 더 정교한 자동 물시계인 옥루를 만들어 냈다. 옥루는 시간을 알려주는 자격루와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는 혼천의의 기능을 합친 것으로, 시간은 물론 계절의 변화와 절기에 따라 해야 할 농사일까지 알려주는 다목적 시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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