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 의한 분야로서 정립되기 위한 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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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 의한 분야로서 정립되기 위한 도정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들어가며
종교학 초기의 역사는 대체로 진화론적인 방법과 연루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논급될 가치가 있는 이유는, 당시 그 분야에서 제법 통일된 연구양태가 이미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광범위한 지역에 흩어져 있던 많은 기관에서 다양한 학자들이 각자 나름대로 그것을 연구하는데 쏟아 넣은 밀도 높은 열성 때문이다. 종교학이 일단 학계에 진출했을 때, 별문제 없이 기존의 교과목 편성에 끼어들 수 있었더라면 그것은 매우 운이 좋은 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실제는 그렇지 못했다.
종교학에 대한 소재는 대개 몇몇 영향력있는 학자들의 선전에 의해서나 이루어졌으며, 반대의 소리도 결코 작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신학의 세력이 강한 곳에서는 종교학이라는 것이 절대를 상대화 함으로서 신자들을 타락시킬것임에 틀림없다고 보는 견해가 널리 퍼져 있었다. 19C말과 20C초 유럽 및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 운영되고 있던 교수과목들을 살펴보면 종교학이 당시 학계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지 잘 알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식의 회고를 만족스러울만큼 포괄적으로 해낼수는 없겠지만, 종교와 학문의 한 분야로서 정립되기 위한 도정을 알아보기로 하자.
본문으로
*일반종교사과목의 전문교수직을 처음마련한 것은 스위스의 제네바대학이었다. 제네바대학의 신학교수들이 일반종교사를 강의하기 시작한 것은 1868년이었고, 전임교수직이 생긴 것은 1873년의 일이었다. 그 자리를 처음으로 맡은이는 테오필레 드로츠였고, 어네스트 쉬트뢰린이 그 뒤를 이었는데 그 과목은 신.구약선경연구를 위한 교양과목으로 강의 되었을 뿐이었다.
*스위스의 바로 뒤를 이어 1877년에는 네덜란드에서 이에 상응하는 발전이 훨씬 광범위한 기반 위에서 이루어졌는데 학문연구의 중심으로서, 또한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전도사업의 중심으로서의 이중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 1877년에 제정된 네덜란드대학 헌장은 4개 주립대학의 신학과들은 네덜란드 개신교회로부터 분리하도록 규정하였다. 그 헌장의 원인에서는 종교학 교수진을 설치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결국에는 신학교수직 이라는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발전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는 세속화풍조의 영향이 강력하게 작용하였으며, 이점에서 네덜란드 대학은 다른나라에서 앞으로 전개될 상황의 한 표본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프랑스 대중생활에서 일어난 극단적인 세속화 추세 및 사제에 반발하는 태도는 종교의 규범적이고도 교의적인 설교를 경멸하는데 그치지 않고 모든 종교적인 가르침의 가치를 부정해 버리는 경향으로까지 치달았다. 그러나 고등교육의 세속화는 1880년대에 프랑스의 종교연구분야에서 괄목할만한 발전이 전개되는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가장 괄목할만한 혁신은 소르본느 대학과 고등교육 실행학교에서 이루어졌다. 1885년에는 가톨릭 신학교수직이 폐지되었고, 하나의 합의가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점차 개별역사 연구과목들의 분야 구분이 매우 다양해지게 되었다.
*프랑스어권 학계의 초기 종교사학사에 또 하나 잘 알려진 인물은 극단적인 합리주의자 고블레 달비엘라로 1884년 브뤼셀 자유 대학의 교과목 편성에 종교학의 과목 도입을 주선하였다. 세기가 바뀔 무렵에는 이것이 철학박사 과정의 필수과목이 되었으며 일반 사회연구과목의 하나로 정립되기도 하였다.
*스웨덴에서는 1877년에 웁살라 대학 신학부에 신학입문 및 신학백과라는 명칭의 새로운 교과목이 개설되었다. 그 과목의 목적은 신학적인 성격의 것이었으나 그 산하에서 종교사도 교수되어야할 것이라는 정도의 인식은 이루어져 있었다. 1877년에서 1901년 사이 웁살라 대학의 그 과목은 주로 루터란 교회의 호교를 위한 도구로 기능하였다. 하지만 그것이 개설되었다고 해서 곧 종교학이라는 용어가 의미하는 바 그대로 세계 제종교에 대해 새로운 태도를 보일 징후까지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세기 전환기 즈음 독일의 여러 대학에서는 종교학의 구성요소들이 거의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 고전연구, 성서연구, 독일연구, 근동권 연구, 비교문헌학. 이런 과목들이 모두 커리큘럼에 정착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떤 명칭으로든)종교학 과목은 없었다. 1910년 베를린 대학이, 또 1912년 라이프찌히 대학이 최초로 일반 종교사과목을 개설하였다. 20C들어 첫 10년사이에 베를린 대학에서는 일반종교사가 과목을 설치할 움직임이 있었는데, 그런 움직임은 독일 대학들 전반에 파급될 듯 싶었다.
종교사 과목을 두 번째로 개설한 독일 대학은 라이프찌히였다. 1910년 당시 라이프찌히 대학은 베를린보다 훨씬 더 보수적이고 고백적인 성격의 학문 풍토를 갖고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바로 이 고백적인 분위기가 종교사 과목 개설의 원인이 되었다.
*대영제국은 종교학 과목의 교직을 설립하는 과정에서 좀 이례적인 양상을 보여주었다. 그 분야의 첫 선구자 중 많은 사람들(특히 문헌학자 및 인류학자들 중에서) 이 영국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중 누구도 1904년까지는 대학에서 이 분야에 관한 직책을 맡은 일이 없었고 또 그 중에는 대학에서 전혀 자리잡지 못한 이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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