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유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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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홍유릉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홍유릉
Ⅰ.홍유릉
홍류릉은 사적 제207호 26대 조선고종황제 홍릉과, 27대 조선순종황제 유릉으로 구성된다.
홍릉은 명성태황후 민씨가 처음 장례된 능호이다. 하지만 1895년(고종32) 일본 정부의 사주로 낭인에 의해 경복궁 옥호루에서 시해당한 명성황후는 궁궐 밖에서 시신이 소각되었다. 폐위되어 서인으로 강등되었다가 같은 해 복호되고, 1897년(광무1) 명성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원래의 홍릉 터는 현재 ‘청량리 홍릉’이라고 불리고 있다. 현재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원래의 모습은 《명성황후홍릉산릉도감의궤》나 당시의 서양인들이 남긴 기록과 사진을 통해 알 수 있다. 당초 동구릉의 숭릉 오른쪽 언덕에 숙릉을 조성하다 국장이 중단된 후 김홍집 내각을 처단하여 국장을 거의 1년 연기하여 1897년 1월 9일에 홍릉을 조성.
그해 1897년 11월 청량리 천장산 아래 새 장지를 정하고 국장을 치르게 되니 홍릉이란 능호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1990년 궁내부 특진관 이재순의 상소에 따라 청량리 홍릉이 풍수지리적으로 허하다는 이류로 일시 천릉(遷陵)이 결정된다. 3차에 걸친 간심 끝에 지금의 홍릉이 있는 금곡으로 결정되었다. 하지만 천릉은 실행되고 있지 않다가 1919년 1월 21일 덕수궁에서 춘추 67세로 고종이 승하하자 그해 3월 4일 현재의 위치에 조성하면서 명성황후의 릉도 옮겨와 합장릉으로 조성되었다. 또한 독자적인 능호는 불리지 않는다.
유릉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효황제와 정후 순명효황후 민씨 및 순정효황후 윤씨를 모신 묘좌유항의 합장으로 유일한 동봉삼실능이다. 유릉은 홍릉과 같이 다양한 형태의 석물이 참도 양 옆에 배열되어 있다. 또한 전체 석물의 조각은 홍릉의 것보다 사실적이고 웅장한 모습으로 현대적 감각을 보여주는 뛰어난 수법이 보인다. 특히 7량관의 금관조복을 하고 있는 문석인은 수염이 잘 다듬어져 있는 등 사실적인 조각 수법을 보인다. 1926년 4월 순종이 승하하자 창덕궁 낙선재로 거처를 옮겼다. 1953년 휴전이 되어 환궁하려 하였으나, 이승만 대통령의 반대로 정릉의 수인재로 거처를 옮겼다. 하지만 1960년 전 구황실사무총국장 오재경의 노력으로 창덕궁으로 환궁하였다. 『서울의 능묘』,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11.
Ⅱ.능의 구성
홍릉은 조선시대 말기에 조성된 능역(陵役) 능을 만들거나 고치는 일.
이다.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황제릉의 양식을 따라 명나라 태조의 효릉을 본떠 조영하였다. 석물을 배전(拜) 종묘나 문묘, 사당 따위의 절하는 단(壇)에 깔아 놓은 벽돌.
의 앞으로 배치하고, 정자각 대신 일자형 건물의 배전을 세웠다. 능침 주위에 배치되었던 석수들은 배전 앞, 참도의 좌우에 그 종류를 더하여 나란히 세워져 있다.
능은 병풍석과 난간석으로 둘렀다. 능을 수호하는 석양과 석호는 세우지 않고 혼유석(魂遊石) 상석(床石) 뒤쪽 무덤 앞에 놓은 직사각형의 돌로, 영혼이 나와서 놀도록 설치한 것.
1좌, 그 양 옆으로 망주석(望柱石) 중국에서 전하여 통일신라에서 발전되기 시작하여, 무덤의 시설형식에 따라 묘주(墓主)의 사회 신분을 나타내는데, 무덤을 지키는 수호 신앙과 기념적인 기능을 가진 석조물.
1쌍을 세우고, 그 앞으로 사각장명등(命燈) 초제(醮祭)를 지낼 때, 병자(病者)의 운명을 가늠하기 위하여 켜놓은 등.
을 설치하였다. 석물의 배치는 홍전문과 배전 사이에 문석인, 무석인,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의 순으로 대칭 되어 있다. 참도는 어도와 신도의 두 단으로 구분되어 있던 기존의 것에 비해 가운데가 높고 양 옆이 한 단 낮은 삼단으로 되어 있다. 이밖에 수복방(守僕房) 조선시대에 종묘, 왕릉 등을 관리하거나 제물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지내던 곳.
, 수라간, 비각(碑閣) 비석을 보호 또는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건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