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혜산兮山박두진 분석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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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兮山 박 두 진
1. 혜산 박두진의 호 혜산(兮山)은 ‘있는 그대로의 산’이라는 뜻이다.
박두진의 생애와 활동
혜산 박두진은 1916년 3월 10일 경기도 안성군 안성읍 봉남리 360번지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부터 청빈하고 무력한 선비로 식량을 꾸려나갈 방도를 갖지 못한 집안이었다. 아버지는 글을 썩 잘하며 지나치게 겸허했고, 건강한 체격에 유교적 덕목을 가진 인자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러한 선친에게서 다섯 살 때 한학을 배웠다. 8세 때 고장치기 ‘나의 인간됨의 바탕과 사상과 정서감정의 질과 기반이 마련된 전기적이며 운명적인 의미를 가진 곳’이란 회상만치, 이곳은 시인에게 인간에 대한 결정적인 이해의 기반을 마련해준 원체험의 고향이다.(김응교, 박두진의 상상력 연구, 박이정, ·2004, p17)
라는 마을로 이주했다.
혜산이 여덟 살부터 열여덟 살까지 산 고장치기 마을은 한국의 전형적인 향토적 공간으로서의 시골의 모습을 띠고 있다. 나의 가장 다감했던 소년시절의 대부분을 길러준 자연 환경은 허허한 벌판이었다. 대부분이 논벌, 멀리 한 이십리쯤 저만치로 길고 묵중한 청룡상 줄기가 그 시야를 하늘로 맞대어 줄 뿐 거기까지는 그대로 일망무제, 아무것도 기리는 것이 없는 허허한 벌판이었다.(박두진, 현대시의 이해와 체험, 일조각, 1995, p87)
청룡산과 사갑들이라는 두 존재가 혜산의 성격이나 그 뒤의 의식구조를 형성하는 가장 잠재적이고 깊고 순수한 자연 조건의 바탕을 이룬 요소였다. 또 하나는 바람인데 시인의 고향 고장치기는 분지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어서 바람이 많았다. 혜산이 어린 시절 체험했던 바람 등 자연과의 교섭은 그의 무의식에 지배되어 원체험으로 자리잡았다. 따라서 그가 겪은 안성이라는 향토적 공간 체험은 그의 의식 구조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열 여덟 살 때 생계를 위해 취직하러 서울로 갔다. 제도기술을 익혀 측량사무소 등을 전전하며 하숙생활을 하는 힘든 생활에서 누님 만순과의 편지 교환은 그에게 큰 위로가 되었는데, 글쓰기와 기독교라는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열장 스무 장씩 깨알같은 글씨로 쓰여진 서정적인 편지 교환으로 그는 의사 감정의 자유로운 토로와 그 표현을 처음 배우기 시작했다. 1935년 나이 19세 때 누님 만순의 권유로 기독교를 만난다. 이때부터 기독교는 서서히 근원적인 힘이 되어, 비관적인 현실을 넘어설 수 있는 강력한 힘으로 작용하게 된다. 성결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뒤에 집사직을 맡는다.
20세를 전후, 습작을 시작하여 한때 민요조 서정시나 동시 등을 발표했던 그는 7,80 편의 습작을 거친 후 1939년 「아」(芽)라는 동인지에 북만주로 이민 가는 동포의 정경을 담은 자유시 를 발표했다. 박두진은 그의 처녀작에 관한 언급에서 활자화 된 첫 작품으로는 아이생활지에 발표된 동요 를 들고, 시로서의 첫 작품으로는 아(芽)지의 를 들고 있다. 이 작품이 활자화 된 것을 보자 문학에의 열정과 신념이 더욱 강해졌다. (박두진, 박두진문학정신①, 신원문화사, 1996, p320)
그의 나이 24세 때인 1939년 「문장」과의 대면은 그의 문학과 인생 전반에 걸쳐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박두진은 당시 정지용이 주간으로 있었던 「문장」에 1939년 6월 , 이 1회 추천되고, 같은 해에 이 두 번째로 추천, 다음 해 1월 , 가 정지용에 의해 추천 완료됨으로써 등단하였다. 다음은 정지용이 밝힌 추천사이다. ‘당신의 시를 시우(詩友) 소운한테 자랑삼어 보이었더니, 소운이 경륜(經綸)하는 중에 있던 산(山)의 시를 포기하노라고 합디다. 시를 무서워 할 줄 아는 시인을 다시 무서워할 것입니다. 유유히 펴고 앉은 당신의 시의 자세는 매우 편하여 보입디다.’(정지용, 문장, 1939.6월호)
‘박군의 시적체취는 무슨 삼림에서 풍기는 식물성의 것입니다. 실상 바로 다옥한 삼림이기도 하니 거기에는 김생이나 뱀이나 개미나 죽음이나 슬픔까지가 무슨 獸臭(수취)를 발산할 수 없이 백일에 서늘없고 푹은히 젖어 있습니다. 조류의 우름도 기이한 외래어를 섞지 않고 인류와 친밀하야 자연어가 되고보니 끝까지 박군의 수림에는 폭풍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항시, 멀리 해조가 울듯이 솨-하는 극히 纖細(섬세)한 松(송뢰)를 가젓기에 시단에 하나의 「신자연」을 소개하며 선자는 滿悅以上이외다.’(정지용, 「문장」, 1939)
해방이후 정치사회적으로 어지러운 상황에서 박두진은 우익문학단체의 중심지였던 ‘을유문화사’안의 ‘아동문학협회’에서 일을 하기 시작하였다. 1946년 4월에는 조선문학가협회의 결성에 참여하였고, 이 즈음에 시집 「靑鹿集」(1946), 「해」(1949)을 발간하였다.
1950년 6월 25일 이후 시인 구상의 소개로 공군의 트럭을 타고 추위 속에 대구까지 온 박두진은 ‘공군 종군 문인단’ 종군작가단은 한국 문예조직의 반공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확고하게 하는데 기여하였다. 박두진, 박목월, 김동리, 황순원, 이상로 등이 단원이었다.(김응교, 앞의 책, p45)
참고문헌

김경복, 서정과 유토피아 사상의 관련성, 국어국문학, 1997
김봉군 외, 한국현대작가론, 민지사, 2001
김용직, 한국현대시인 연구,하,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0
김용직, 해방기 시단의 청록파 -박목월조지훈박두진의 초기 작품세계-, 외국문학 1989년 봄호, 1989
김응교, 박두진의 상상력 연구, 박이정, ·2004
김원호, 현대시 분석노트, 디딤돌, 2007
김준오, 시론, 삼지원, 2007
임영주, 「박두진의 생애와 문학」, 국학자료원, 2003
문덕수, 「한국 현대 시인 특성론」, 국학자료원, 2000
박철희, 「서정과 인식」, 이우출판사, 1984
백승란, 박두진 초기시에 나타난 기독교적 상징, 인문학연구, 2007
백승란, 박두진 시의 율격 연구, 인문학연구, 2008
신익호, 현대시에 나타난 기독교적 메시아 사상 -윤동주박두진의 시를 중심으로-, 국제어문, 2000
이상호, 청록파 연구 -청록집을 중심으로-, 한국언어문화, 2005
전미정, 서정주와 박두진의 생태시 비교연구, 비교문학,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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