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로서의 한용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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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로서의 한용운
만해는 늘 마음속에 세 가지의 커다란 바램(願)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는 부처님 정신으로 철저하게 살기 위해 혜초처럼 부처님 땅을 가보는 것이었고, 둘째는 중생제도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서 언론매체를 생각하고 잡지사와 신문사를 하나 경영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셋째는 백두산 천지에 오르는 것이었다.
이순신 사공 삼고 을지문덕 마부 삼아 파사검(破邪劍 : 사악을 베는 칼) 높이 들고 남선북마(南船北馬 : 남쪽으로 배 달리고 북쪽으로 말 달려) 하여 볼까 하는 시의 내용처럼 남아의 이상을 마음껏 펼쳐보고 싶은 그런 원이었다. 그런 큰 뜻을 가진 만해이었기에 우리 민족 전체를 다 들어 올릴 수 있는 저울추의 역할을 기미년에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었다.
1910년 8월 일제의 조선 강점 이후 조선총독부는 무단정치 10년을 통하여 민중의 귀와 눈과 입을 다 막아버렸다. 서울로 되돌아온 그는 먼저 민중의 입과 눈과 귀를 열게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종합교양잡지 《유심 惟心》(1918년 9월 1일)을 창간하였다. 불교 근대화와 신문화 운동의 전개로서 주로 민족의 정통성과 자존성을 가진 우리 청년들에게 용기와 신념을 잃지 말라는 내용의 잡지였다. 여기에 기미 3·1운동에 동지로 규합될 육당 최남선, 최린, 백용성 등이 글을 기고했다. 많은 원고를 총독 검열에서 삭제당하는 아픔을 겪으면서 만해는 굴하지 않고 언론활동에 필요한 세계정세에까지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기고했다.《유심》잡지 제2호를 내고 제3호를 만들 무렵, 세계정세는 급격히 변하고 민족의 자주독립을 주장하는 소리가 높아갔다. 1918년 12월 초에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제창되었는데 때마침 기사가 매일신보에 게재되었다. 약소민족은 모두 일어나서 독립운동을 하라는 기사의 내용은 바로 만해 스님의 끓는 가슴에 기름을 붓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이에 그는 구황실의 귀족들과 종교계 인사는 물론 지도급 인사들을 다 끌어 모아 200명 정도의 동지들을 규합하여 거국적인 행사로서 민족의 자존심을 세계만방에 외치자는 의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1919년 1월 27일(음력 1918년 12월 26일) 그는 최린을 은밀히 만나 그간의 결심을 털어 놓으면서 우리도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최린의 동의를 얻은 후 권동진, 오세창도 적극 참여한다는 뜻을 확인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으로는 자주독립해야 한다는 사실은 자명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모으기란 그렇게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월남 이상재 선생을 찾아가 독립운동에 대해 소상히 설명하자 그는 잘못하면 폭동이 일어나 많은 사람이 다칠 것이니 일본 총독부에 를 내자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때 만해는 ‘조선독립이라고 하는 것은 제국주의에 대한 민족운동이요 침략주의에 대한 약소민족의 해방투쟁인데 청원에 의한 타의의 독립운동이 웬 말입니까? 민족 스스로의 결사적인 힘으로 나가지 않으면 독립운동은 불가능한 것이다’라고 반박하며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렸다. 그 이후 월남 이상재와는 영원히 결별해 버리고 말았다. 또한 박영효, 한규설, 윤용구 등 귀족들과 접촉했으나 가진 자들은 한결 같이 꽁무니를 뺐다. 처음 200명으로 계획했던 거사가 실패할 지경에 이르렀다. 귀족들과 지도급 사람들은 다 빠지고 종교 운동가들만 남게 되었다. 서울을 중심으로 기독교 세력을 규합하던 월남 이상재가 빠져나가자 남강 이승훈 선생이 평양 사람들을 중심으로 기독교인 16명을 모으고 천도교에서 15명, 불교에서 2명으로 33인이 구성되었다. 그리하여 손병희 선생의 승낙을 받고 당시의 거부 민영휘를 찾아가서 거사자금을 마련하여 이를 계획하였다.
손병희 선생을 33인의 대표로 추대하고 최남선이 작성한 에 만해 한용운의 이 첨가되었다. 기미년 3월 1일, 종로 태화관에서 최린의 사회로 "이제 우리는 조선의 독립을 선언했으니 죽어도 한이 없다"는 만해의 축사와 독립만세를 선창하고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마포경찰서로 잡혀가게 되었다.
붙잡혀간 독립지사들은 말할 수 없이 심한 고초를 당해야 했는데, 국가내란죄로 사형된다는 소문에는 모두 마음이 약해졌다. 미결수로 있는 동안 너무 힘들어 눈물 흘리는 그들에게 똥통을 둘러엎으며 만해는 "나라 잃고 죽는 것이 서럽거든 당장에 취소하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만해는 옥중에서 옥중투쟁 3대원칙을 정하고는 몸소 실천에 옮겼다. 첫째는 변호사를 대지 말자는 것이었다. 내 나라를 내가 찾는데 누구에게 변호를 부탁할 것이냐, 변호해 줄 사람도 받을 사람도 없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사식을 받지 말자는 것이었다. 온 천지가 다 감옥인데 호의호식하려고 독립운동하지 않은 이상, 밖에서 넣어 주는 사식을 먹지 말자는 것이었다. 셋째는 보석을 요구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만해는 이렇게 3대원칙을 정해놓고 옥중에서까지도 철저하게 항거했다.
공판할 때 33인을 한 사람씩 불러 사실 심문이 시작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에 관심을 가지고 몰려들어 방청석은 꽉 찼다. 그 중 당시 가장 엘리트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최린 선생이 아주 명쾌한 논리로 일본의 무단정치 10년을 고발했다. 시대적인 배경과 함께 일본 정치의 잘못된 점을 낱낱이 고발해 사람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했다.
그때 만해는 최린의 진술을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최린의 논리에 의하면 만약 일본이 정치를 잘했다면 오늘의 독립운동 같은 것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과 같았다. 만해는 당장 그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고우(古友, 최린의 호), 내가 내 나라 찾자는 일에 일본 정치 잘하고 못하고가 무슨 소리요’ 하며 최린 선생을 크게 꾸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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