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용운에 대하여 - 전환기의 문학관, 시가 말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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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용운에 대하여 - 전환기의 문학관, 시가 말하는 것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한용운에 대하여
목 차
1. 들어가는 말
2. 전환기의 문학관
3. 시가 말하는 것
1. 들어가는 말
독립운동가에 불교 사상가요 문학인이었던 한용운의 여러 활동 중 가장 뛰어난 분야는 역시 시인으로서의 탁월한 업적이 아닐까 싶다. 독립운동사적으로 본다면 무장투쟁이 항일운동의 주류를 차지할 수밖에 없으며, 불교운동사로서는 그의 열정적인 ‘불교유신운동’에도 불구하고 비구의 계를 타파한 혁신사상이 전통적인 신앙풍토에서 비켜 서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문학인 한용운은 시. 수필. 소설. 평론 등 여러 장르에 걸쳐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명성에 어울리릴 성과를 이룬 분야는 역시 시라고 하겠다.
만해의 시작품은 발표 당시의 문단적인 외면에도 불구하고 1920년대 실국민(失國民)의 정서를 가장 절절 직정하게 표현한 걸작으로 문학사의 주류로 확고하게 자리 매김 했다고 평가하는데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1920년대의 문단적 풍토, 3.1운동으로 쟁취한 세칭 ‘문화통치’의 부산물이 낳은 시대적 분위기에 식민통치 이후 1기 유학생들의 약간은 우쭐대는 왜색(倭色) 짙은 센티멘탈리즘적인 낭만주의 문학이 주류를 이뤘던 시기에 만해는 지조 높은 독립운동가 승려였다. 그의 시선으로는 당시의 문사들- 이광수와 같은 명망가들- 이 발표했던 작품이 어떻게 비춰졌을까를 상상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한용운은 지체 높은 집안 출신도 아니요, 권세 부리던 전통적인 주자학의 후예도 아니었고, 신문물의 도입 통로였던 기독교인도 아니요, 일본이나 중국 혹은 미국이나 러시아 유학생도 아니었다. 그는 개벽 세상을 이룩하려던 동학혁명에 자신의 운명이 바뀌어야하는 기구한 세파에 실려 승려의 길을 선택했는데, 이 말은 곧 당대의 역사적인 흐름에서 지배층에 정면 도전했다가 실패하자 한 걸음 비켜서게 되었다는 뜻이 된다. 그 비켜 서 있음으로서의 역사적인 현실 인식이 바로 만해의 문학관을 이루는 초석이 되며, 여기에 그의 시 창작 성공의 비결이 있지 않았나 싶다. 그는 비록 일단 역사적인 대격변의 현장에서 비켜 섰으나 이내 3.1운동을 계기로 민족운동사의 중심부에 접근했지만 이내 승려로서의 신분에서 어긋할만한 파계적인 투쟁 노선은 선택하지 않으므로 써 후기 독립투쟁사에서는 멀찌감치 비켜서게 된다. 한용운은 비단 독립운동사에서 뿐만이 아니라 문단사에서도 항상 멀찌감치 비켜 서있었다.
식민 강압 통치 제2기(즉 3.1운동 이후의 1920년대)에 한국 시문학사의 두 거성(김소월과 한용운)이 당대의 문단적인 주류에서 비켜 서있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라 그 당시 한국 문단이 처했던 편협한 유파주의와 치졸한 예술적 기교주의의 한계성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읽을 수 있다. 아니, 1930년대까지 시선을 확대하여 본다면 이상화. 이육사 등도 당대적인 문단 주류에서는 한 발짝 비켜 서있었음을 감지할 수 있는데, 이런 현상 역시 어떤 면에서는 만해의 입장과 같은 궤적에서 평가할만하다고 본다.
만약 당대의 문단적인 주류에 휩쓸렸다면, 만해나 소월이 나 등에 몸을 담았거나 카프에 적극 가담했었다면 과연 그들의 독창적인 시세계를 이룩할 수 있었을까. 이들 네 시인 중 이상화 정도가 잠깐 외도처럼 문단에 몸을 던졌지만 그 역시 이내 당대 문단의 주류에서는 한 발자욱 떨어져 자신의 민족의식을 형상화하는데 전력했다. 이 말은 문단적 주류를 부정적으로 보려는 게 아니라 당대적인 문학적 한계와 왜소성을 탈피할 수 있는 계기를 김소월이나 한용운이 어떻게 구축했는가를 객관적으로 해명하려는 의도에서 주장한 것일 뿐이다.
역설적이지만 만해가 시인이 되려했다면, 더구나 1920년대의 한국 문단을 풍미했던 일본 유학파란 꼬리표를 단 ‘선구자’ 시인들의 뒤를 쫓아 그런 시를 모방하며 시인이 되려고 문학수업에 전념했다면 필경 그는 실패한 시인으로 전락했을 터이다.
나는 서정시인이 되기에는 너무도 소질이 없나 봐요.
‘즐거움’이니 ‘슬픔’이니 ‘사랑’이니 그런 것은 쓰기 싫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