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원의 작품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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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박태원의 작품세계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박태원의 작품세계
목차
-본문1. 박태원의 전기적 생애
-본문2. 박태원의 문학적 특성
1)주제적 특성
2)형식적 특성
3)박태원의 문학과 이상(李箱)
-본문3. 박태원의 문학사적 의의
-마치며
1. 박태원의 전기적 생애
구보(仇甫) 박태원(朴泰遠, 1910~1986)은 1910년 1월, 할아버지가 높은 벼슬을 지낸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다. 박태원이 태어날 당시 아버지는 서울 수중박골에서 약국을 경영하고 숙부는 병원을 경영한다. 이렇듯 꽤 유복한 집안에서 어릴 적에 한학을 익히고 「춘향전」, 「심청전」 같은 고대소설을 읽다가 그는 경성 제일고보에 입학한다. 이후 문학서적의 탐독과 창작에 더욱 열을 올려, 2학년 때인 1923년엔 에 「팔학(八學)」이라는 글을 투고해 당선된다. 1926년에도 「누님」이라는 시를 발표하는 등 이른 나이부터 문학 쪽에 강한 욕구를 보이지만, 학교의 수업방법과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나머지 4학년 때 휴학을 한다. 휴학하는 동안 박태원은 고모의 도움으로 이광수를 만나 문학 수업을 쌓는다. 복학해 1929년 제일고보를 졸업하고는 하루에 다섯 시간 동안 독서를 하며 시·소설·평론 등을 발표한다. 1930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호세이대학 상과에 들어간 박태원은 학교 수업보다는 영화·미술·음악 등에 흥미를 느끼고 거기에 빠져든다. 최신 유행하는 머리와 차림새로 현대적 분위기에 젖어 술집과 영화관 등을 돌아다니던 그는 결국 2년 만에 학업을 중단하고 돌아온다.
박태원의 본격적인 작품 활동은 구인회 가입과 때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구인회가 발족하고 나서 얼마 뒤 회원 가운데 유치진 등이 이탈하자 이상과 함께 그가 이 모임에 대신 들어간다. 1934년 「중앙일보」에 이상이 그린 삽화와 함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을 발표하면서 그는 1930년대 모더니즘 소설을 대표하는 작가로 떠오른다. 이때 생긴 호인 구보(仇甫)는 해당 작품을 쓰고 난 뒤부터 붙게 되었는데, 하지만 ‘거만한 사람’이라는 뜻의 이 호에 대해 박태원 자신을 비롯해 친구들도 썩 달갑게 생각하지 않아 얼마 뒤 이것은 ‘높은 사람’이라는 뜻이 있는 구보(丘甫)로 바뀌게 된다.
이후 그는 구인회 회원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생활과 창작을 영위해 나가는데, 그중에서도 이태준과는 먼 뒷날까지 뜻을 같이하는 평생의 지우 관계를 맺는다. 자신을 천재로 여긴 것도 마찬가지고 강한 실험정신과 새로운 세계를 추구하는 열정을 지닌 점에서도 서로 비슷한 이상과도 각별하게 지낸다. 이상이 경영하던 다방 ‘제비’와 이 다방과 가까운 거리에 있던 박태원의 집을 오가며 그들은 술과 문학 얘기로 밤을 지새우곤 한다.
한때 이상과 견줄 만큼 강렬하던 박태원의 모더니즘 색채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리얼리즘 색채와 섞이게 된다. 그는 1934년에 「애욕」을, 1936년에 「천변풍경(川邊風景)」을 《조광》에 발표하는데, 이런 작품에서 벌써 변모를 엿볼 수 있다. 이 무렵 박태원의 집은 서울 청계천 언저리에 있었다고 한다. 당시 청계천 일대는 아낙네들이 모여 빨래를 하는 풍경과 막 박동을 시작한 근대 도시의 풍물이 뒤섞여 있던 곳이다. 바로 이 청계천변의 세태와 풍속을 담아낸 작품이 장편 「천변풍경」이다. 박태원 스스로도 늘 대학노트를 들고 다니며 거기에 도시의 풍물과 군중의 모습을 적고, 상상력만으로는 소설이 되지 않아 실물을 눈으로 보기 위해 도심지를 오간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이후에도 박태원은 1937년 「성탄제」, 1939년 「골목 안」, 「명확한 전망」, 1941년 「여인 성장」 등 서민들의 일상생활과 풍속을 그린 세태 소설을 계속 발표한다. 그러다가 해방 직전인 1943년께에는 「수호전」 같은 동양고전의 번역이나 역사물에도 손을 댄다.
해방 뒤, 박태원은 곧바로 본격 창작에 나서지 않고 「조선독립 순국열사전」, 「약산과 의열단」,「이 충무공 행록」 등 항일투사와 애국자들의 전기에 매달린다. 1949년에 들어 사이비 종교인 백백교를 다룬 장편 「금은탑」을 발표한 그는 1950년께 절친한 문우인 이태준의 영향으로 월북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후 그는 월북 뒤 박태원은 김일성대학 교수로 재직하던 중 당의 눈 밖에 나서 강제노동수용소로 쫓겨나기도 한다. 1960년 다시 창작 활동에 임하게 된 그는 역사소설 「갑오농민전쟁」 3부작 가운데 1부인 「계명 산천은 밝았느냐」 등을 내놓는다. 그는 1965년께 망막염을 앓아 실명하고 1975년 뇌졸중으로 전신불수가 되고 나서도 집필 의지를 꺾지 않는다. 북녘에서 얻은 아내에게 구술하는 방식으로 1977년부터 3부작 「갑오농민전쟁」의 집필을 이어간 것이다. 박태원은 결국 1984년 「갑오농민전쟁」을 탈고한 뒤, 1986년 7월에 숨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