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화론의 약전과 작품 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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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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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임화론
1. 약전 및 작품경향
임화(林仁植)는 평론가로서 문예 이론과 문학사 연구에 많은 업적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시인으로서도 우리 문학사에 일정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그는 일제 강점기, 을유 해방, 남북 분단, 민족 상잔의 전쟁을 거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선택한 이데올로기와 민족 해방 운동의 제물로 바쳐졌다.
임화의 본명은 인식(仁植). 필명은 청로(靑爐)김철우(金鐵友)쌍수대인(雙樹臺人)성아(星兒)임화(林華) 등이다. 1908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를 중퇴한 후, 1926년부터 {매일신보}, {조선일보} 등에 문학론과 모던한 시들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미목수려한 장발의 시인인 이상화를 동경하는가 하면, 영화 평론과 영화 제작에 참여하였다. 잡지 《학예사(學藝社)》 주간을 거쳐 1927년경에는 KAPF(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에 가입하였으며, 조직활동에서 줄곧 중추적 역할을 했다.
시인으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1929년 무렵부터로, 이때 그는 《우리 오빠와 화로》 《우산 받은 요코하마[橫濱]의 부두》 《네거리의 순이》와 같은 단편 서사시 계열의 시를 발표하면서 계급 문학 운동의 대열에 참여하며 경향시가 지향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1930년대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정세악화로 카프가 해산되고 정치투쟁에의 길이 봉쇄되자, 그의 평론활동은 좀더 문학 내적 방향으로 회귀하게 되고, 여기서 세태소설론내성소설론 통속소설론본격소설론 등 일련의 소설론이 제기된다. 이 가운데, 그는 성격과 환경이 조화를 이루는 본격소설을 문학의 정도(正道)로 파악하고, 이에 이르는 방법으로서의 리얼리즘론을 전개했으며, 다른 한편으로 신문학사의 서술에도 관심을 기울였는데, 한국문학사를
이식 문학사라고 규정한 문학사 연구를 통하여 문학 연구의 한계와 진전을 아울러 보여주기도 한다. 특히 그의 《개설 신문학사》에서 체계적인 방법론을 갖춘 최초의 근대문학사가 시도되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임화는 일제 강점 상태에서 문인이 할 수 있는 의무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된다. 그래서 1929년 일본에 건너가서 당시 일본에서 노동 사상 운동을 하던 김두용이 발행한 {무산자}라는 출판물에 관여하면서, 무산 예술 운동의 전위(前衛)가 되고자 한다. 1930년 일본에서 귀국하여, 그 동안의 KAPF의 이론가이자 지도자들이었던 김기진, 박영희와의 이론투쟁을 통하여 조직의 장악하게 된다. 이후부터 1935년 KAPF가 해산될 때까지 대중화 논의나 창작 방법 논의에 깊이 관여한다. 이처럼 임화는 일제 강점기 전 기간을 통하여, 문학 연구와 작품 행동에 남다른 공헌을 하였다.
KAPF 활동기에 일제의 갖은 탄압 속에서도 살아남은 임화는 그로 인하여 숱한 의혹을 불러일으켰으며, 그에 대한 이 같은 의혹은 일제 말 암흑기에 친일 문인 단체인 에 가입한 것과도 관련이 있다. 1945년 민족 해방을 맞이하자 그는 곧바로 민족 문학의 재건에 뛰어든다. 그리하여 을 조직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그후 재편된 을 중심으로 해방 정국에서 좌파의 문학 운동을 주도한다. 특히 이 조직은 박헌영이 이끈 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으면서 문학의 정치 투쟁으로의 임무를 수행한다. 그 후 월북하여 1953년 남로당 숙청 때 미제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처형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작품으로는 시집에 《현해탄(玄海灘)》 《찬가(讚歌)》 《회상시집(回想詩集)》 등이 있으며, 평론집에 《문학의 논리》가 있다.
2. 작품세계
임화는 낭만적이고 감상적인 생각과 사상이 일제 강점기의 문학 청년들에게 만연됐을 때,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들을 끊임없이 보여주었다. 그는 문학론과 시 창작을 통하여, 당시의 민족 현실과 민족의 삶을 사실적으로 형상화하고자 했다. 이 점은 그의 대표적인 시인 [우리 오빠와 화로]의 일절을 보아도 쉽게 드러난다.
사랑하는 우리 오빠, 어저께 그만 그렇게 위하시던 오빠의 거북무늬 질화로가 깨어졌어요.
언제나 오빠가 우리들의 피오닐조그만 기수라 부르는 영남이가
지구에 해가 비친 하루의 모든 시간을 담배의 독기 속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