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화尙火이상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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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상화(尙火) 이상화론
1. 생애와 활동
상화[무량(無量)상화(想華)백아(白啞)] 이상화는 별호를 4개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의 인생 역정과 관계를 가진다. 문단에 나오기 전인 20세 이전에는 무량(無量)이라는 불교 용어로 호를 지었다. 요새 말로 하면 한량없는이라는 뜻인데 사실상 그 시절 그는 무엇 하나 아쉬울 것 없고 마음먹어 못한 일없고 남에 뒤질 것 하나 없는 무량 대복을 지닌 청년이었다. ‘상화(尙火)는 문단에 나온 후 항상 불같이 작품을 써낼 때 자주 사용하던 호다. 22년에서 26년, 그 기간이 ’상화(尙火)가 열심히 문학 활동을 했던 때고 그 후로는 도망 다니고 체포되고 감옥살이하고 중국을 방랑하면서 고초를 겪느라고 제대로 작품 활동을 못했다.‘상화(想華)’라는 호도 사용했는데 그것은 그가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에 한계를 느끼고 중국에 가서 지은 호라고 볼 수 있다. 지명수배자의 운명이라 활동은 활동대로 못하고 쫓기는 자의 불안 공포에 찌들린 마음을 만주 독립운동을 생각하며 위안을 얻으려 했는지 모른다. 이렇게 본명과 발음이 같은 별호를 사용하다가 36년 무렵부터는 백아(白啞)라는 호를 사용한다. 말 그대로 백치와 벙어리처럼 살지 않으면 안될 시절이었다. 가산은 완전히 날아갔고 심리 상태도 백치처럼 되고 싶었고 보고 듣고 말하는 것 모두로부터 도피하고 싶던 시절의 호이다.
이상화는 1901년 5월 22일(음력 4월 5일) 대구시 계산동 2가 84번지 대지주의 가문에서 아버지 우남(雨南) 이시우와 어머니 김신자의 4남중 둘째로 출생했다. 상화는 7세 때 아버지와 사별 명망있는 가문의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지만 7세 때 아버지를 일찍 사별하는 바람에 마음에 그림자가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러한 유년 시절의 아비 상실은 모성에 대한 갈망 또는 여성 민감증으로 인한 방황, 즉 female complex를 형성한 것이 아닐까 한다. 이러한 아비 상실로 인한 모성 편향성은 그에게 공적 차원에서 아비 찾기로서의 항일 운동과 상대축을 이루는 내용으로서, 이후 「나의 침실로」, 「이별을 하느니」등의 낭만적 성향의 시편들로 형상화되는 모습을 보인다.
하였으나, 국량있고 관대한 어머니와 민족주의자요 육영의 지사인 백부 이일우의 엄한 훈도 밑에서 선비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1915년 서울 중앙학교(현 중동학교)에 입학한다. 학업도 우수하고 야구에서 재능을 보였으나 삶에 대한 번민으로 1918년 3년 수료 후에는 다시 낙향하여 방황을 거듭하게 된다. 이런 청소년기의 방황 끝에 그는 이 해 여름 수개월간에 걸쳐 금강산 등을 풍찬노숙하는 방랑길로 접어든다.
31운동중, 상화는 3월 8일 백기만 등과 함께 대구거사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배후 조종 혐의로 일제 관헌의 추적을 받아 다시 서울로 도피하여 서대문 밖 냉동(현 냉천동)에서 친우인 박태원의 하숙에 머물게 된다. 하지만 여의치 않은 사정으로 말미암아 다시 귀향하게 되어, 이 해 음력 10월 13일에 백부의 엄명으로 公州 서한보의 딸 서순애와 결혼한다.
1921년에 다시 상경하여 동향 친구인 현진건의 소개로 박종화(朴鍾和)를 만나게 되고 그들과 의기 투합하여 ≪백조≫동인에 가담한다. 이 ≪백조≫ 동인 가담과 「말세의 희탄」 말 그대로 말세의 절망과 자학, 비탄과 자조가 얽혀진 데카당의 노래라고 하겠다. “피묻은/병든/꿈꾸는/술취한/속아픈”이라는 관형어가 환기하는 감상적몽환적퇴폐적 정조는 그야말로 김억의 「오뇌의 무도」가 휩쓸던 당대의 퇴폐적감상적 우울과 자학의 풍경을 반영한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퇴폐적감상적몽환적 분위기는, 실상 이상화는 물론 박종화의 「死의 예찬」「흑방비곡」, 박영희의 「유령의 나라로」,「幻影의 황금탑」등 백조파의 일반적인 분위기에 해당한다. 다만 이상화의 경우는 이들과 달리 덜 추상적이고 비관념적인 모습으로 보이는 게 특징이라면 특징이 되겠다.
, 「單調」발표로 인해 비로소 시인 이상화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1922년에 프랑스 유학을 뜻에 두고 일본에 갔고, 1923년 9월 ≪백조≫3호에 「나의 침실로」 이 시는 애타는 연애 감정과 숨막히는 성적 충동을 박진감있게 묘파한 시라고 하겠다. ‘밤→동굴→침실→부활’이라는 내용 전개가 ‘물→불→피→물’로 이어지는 성적 충동과 관능적 황홀로 형상화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 시는 이상화와 유보화 사이에 있었던 열애 체험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무렵≪백조≫에 「말세의 희탄」을 발표 후 1922년 상화는 동경행을 감행하고 여기에서 유보화라고 하는 함흥 출신 미인과 열애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를 발표했다.
1923년 9월 참혹한 관동대진재를 겪으면서 새삼 망국민의 비애와 절망을 절감하게 된다. 관동대진재의 몸서리치는 참상을 보고 민족적 절망을 겪은 나머지 1924년 이상화는 프랑스 유학의 꿈을 버리고 동경으로부터 귀국한다. 바로 여기에서 그는 새롭게 대두하기 시작한 현실주의 진보주의 문학으로서 계급주의 문학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다. 망국의 민족적 현실과 그 현실에서 특히 고통받는 민중의 참상에 대한 응시와 애정으로 문학주의로부터 현실주의로 이행해 가게 되는 것이다. 이상화의 민중 정서는 매우 생활화되고 의식화된 모습을 보인다. 먼저 시「구루마꾼」에는 「街相」이라는 큰 제목 아래 수레꾼, 거지, 엿장수 등 이른바 기층 민증울 노래하면서 민중의 고달픔과 슬픔을 형상화한다. 시「저무는 놀 안에서」는 노동하는 계층으로서 기층 민중의 노고와 아버지를 찬양한다. “농민의 정서를 읊조림”이라는 부제가 붙은 시「비를 다고!」에선 농민들의 수난과 시련을 형상화한다. 일제 강점기 수난과 시련 속에서 사람에 시달리고 끝내는 천재 지변으로 한발에 시달리는 농민의 참상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상화의 시는 1920년대 중반에 이르러 완전히 현실주의 문학으로서 민족 문학 또는 민중 문학으로 전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926년에 경향파 집단(PASKYULA, KAPF)에 가입했고, ≪개벽≫6월호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 시에서 들(땅)이란 농민에게는 농토, 즉 생존권을 뜻하며 국민에게는 영토, 즉 주권을 의미한다. 아울러 땅은 민족이 수천년 살아온 역사의 표상이자 민족혼의 상징이 된다. 바로 이 점에서 주권을 빼앗기고 생존권마저도 빼앗겨 가는 상황, 마침내는 봄으로 상징되는 자연까지도 완전히 박탈당할 것이라는 위기 의식을 날카롭고 섬세하게 형상함으로써 상화는 이 땅 민중시 또는 저항시의 한 정점을 일구어 내게 된다. 바로 이러한 민족 의식과 민중적 생명력 그리고 예술 의식이 탄력있게 결합됨으로써 예술적 형상화를 이루어 냈다는 점에서 상화의 시는 단순히 계급적 울분을 드러내거나 계급 해방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를 발표했다. 개인적 절망과 시「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인한 현실적인 압박과 수난, 그리고 그가 잠시 몸담았던 카프가 목적 의식기로 접어드는 데 따른 이념적 좌절감으로 인해 마침내 상화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인해 일제 당국으로부터 ≪개벽≫이 폐간 조치된 점도 있으나 카프 진영이 목적 의식기로 변모하기 시작한 저간의 사정도 작용했던 것이다. 이 무렵 상화는 동경 시절 사귀었던 유보화가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함흥으로 달려가 함께 지내기도 하지만 끝내 유보화는 사망을 하고 또다시 그는 절망에 빠지게 된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예술적 절정에 이르는 순간 다시 실존적 절망과 사회적 핍박을 겪게 되는 지점에서 낙향으로 심신을 추스르고자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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