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화 이상화론 - 상화 이상화의 생애와 활동 & 작가의 문학적 경향

 1  상화 이상화론 - 상화 이상화의 생애와 활동 & 작가의 문학적 경향-1
 2  상화 이상화론 - 상화 이상화의 생애와 활동 & 작가의 문학적 경향-2
 3  상화 이상화론 - 상화 이상화의 생애와 활동 & 작가의 문학적 경향-3
 4  상화 이상화론 - 상화 이상화의 생애와 활동 & 작가의 문학적 경향-4
 5  상화 이상화론 - 상화 이상화의 생애와 활동 & 작가의 문학적 경향-5
 6  상화 이상화론 - 상화 이상화의 생애와 활동 & 작가의 문학적 경향-6
 7  상화 이상화론 - 상화 이상화의 생애와 활동 & 작가의 문학적 경향-7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상화 이상화론 - 상화 이상화의 생애와 활동 & 작가의 문학적 경향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상화 이상화론
1. 상화 이상화의 생애와 활동
이상화의 호는 무량(無量), 상화(想華), 상화(尙火) 백아(白)이며 본명은 상화(相和)이다. 無量은 18세경 문단에 데뷔하기 이전에 쓴 호이며 불교적이고, 想華는 1925년 「개벽」 3호에 사용했으며 탐미적이다. 尙火는 문단에 나온 이후 사용하였고 혁명적이며, 白는 자조적이며 30년대 후반 고향의 친구들이 주로 불렀던 호며, 백치, 벙어리라는 뜻이다. 이러한 호의 변화는 그의 사상적 심경의 변화를 알 수 있다. 김윤정, 명지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학위 논문(1999)
그는 1901년 4월 5일 대구에서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형제로는 큰형 상정(相定)과 동생 상백(相佰), 상오(相旿)가 있다. 상정은 독립 운동가이자 중국군 사령부의 장군이었고, 상백은 저명한 사회학자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대한 올림픽 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상오 역시 문무를 겸비하여 문학 활동을 하기도 했고, 이름난 수렵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7세때 아버지와 사별하였으나 국량 있고 관대한 어머니의 존재와 백부 이일우가 세운 학교에서 한문 교육을 받았는데, 백부의 훈도와 유년기 체험은 훗날 이상화의 인격형성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당시 그의 가문은 삼 천석 부자로 알려질 만큼 대구에서 명망이 높은 집안으로, 백부 이일우는 우현서루(友弦書樓)를 세워 많은 인재를 길러냈으며, 교육 이외에도 가산(家産)을 독립자금에 쏟아 부을 만큼 지사(志士)적 면모를 갖춘 사람이었다. 그런가 하면 이상화의 형 이상정은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는 등 그의 가문 사람들은 그야말로 우리나라가 겪은 난세를 의롭게 살아간 대구 명문가의 후예들이었다.
이러한 그의 집안내력은 그의 시작 전반에 정신적 기조를 형성하는 민족주의 사상과 저항의식의 토대가 된다.
그는 15세 때 상경하여 중앙학교(현 중동학교)에 입학했고, 1918년에 3년 과정을 수료하고 졸업하지 않은 채 대구로 내려갔다. 그는 3학년에 접어들면서 인생과 우주에 대한 철학적 번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러한 갈등으로 이상화는 1918년 여름부터 수개월 간 방랑을 하게 되고 금강산을 비롯 강원도 일대를 방랑하기도 했으며, 1919년 3월 1일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는 백기만 등과 함께 대구 학생 운동을 계획했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피신하기도 했다.
1922년 동인지 「백조」 의 동인이 되면서 공식적인 문단 활동을 하였고, 1923년 프랑스로 가기 위해 동경으로 건너가 불어를 배웠는데 그 해 9월 관동대지진이 일어나고 ‘불손한 조선인’으로 붙잡혔다 간신히 살아났다. 그 후 그 사건으로 인해 정신적 타격을 받은 이상화는 프랑스행을 포기하고 서울로 돌아온다. 그는 1919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에 공주의 명문가 딸인 서온순과 결혼하나, 곧 상경하고 별거 생활을 하게 되었고 그 후에 여러 여성들과 교유가 있었다. 그 가운데 함흥 출신의 미인이던 유보화와 열렬한 사랑에 빠졌으며 그녀와의 사별 후 그 비련은 작품 ‘이별’의 모티브가 될 정도였다.
1922년 등단 이후 계속 시를 발표했고, 그의 문단 데뷔작은 「백조」 창간호에 실은 ‘말세의 희탄’이나, 그의 대표작으로는 1923년 3호에 실은 ‘나의 침실로’와 1926년 「개벽」 6월호에서 발표한 민족저항시의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가 있다.
이상화는 1927년 대구에 돌아와 의열단 ‘이종암 사건’에 연루되어 수 차례 옥고를 치르고 1934년에는 조선일보 경북 총국을 경영했으나 실패, 1935년에 중국으로 건너간다. 1937년 이후 교원 생활을 하면서 ‘국문학사’, ‘불란서 시 평석’ 등을 기획하지만, 완성하지 못하고 1943년 위암으로 세상을 떴다.
2. 작가의 문학적 경향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 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