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사 이원록 이육사李陸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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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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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이육사(李陸史)
-민족시인, 저항시인
1.육사의 생애
이육사의 본명은 원록(源綠) , 별명은 원삼(源三) ,후에 활(活)로 개명, 경북 안동에서 가호의 둘째 아들로 출생. 퇴계 이황의 14대 손이며 외조부는 한말의병장 허형(許衡)이다. 그의 시에 나타나는 굳은 기백과 지사적 절개는 핏줄로 타고난 것인지도 모른다.
조부 밑에서 한학을 배웠으며 배문의숙에서 신학문을 배우고,대구 교남학교에서 잠시 수학(修學). 22세때 1925년 독립운동단체 의열단에 입단, 중국 북경을 오가며 항일투쟁에 나섰다.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3년형을 받고 투옥되었다. 이때 그의 수인번호가 64번이어서 호를 육사로 택했다고 전한다. 1929년 출옥,이듬해 다시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곳 북경 대학 사회학과에서 수학하면서 만주와 중국의 여러 곳을 전전, 정의부, 군정부, 의열단 등 독립운동단체에 가담하여 독립투쟁을 벌였다.
육사가 본격적으로 시를 쓰는 것은 서른이 넘어서다. 문학보다 투쟁이 먼저였다.1933년 에 발표한 을 발표. 1934년 신조선사 근무를 비롯하여 중외일보사.조광사.인문사 등 언론기관에 종사하면서 시 외에도 한시와 시조.논문.평론.번역.시나리오 등에 손을 대에 재능을 나타났다. 1935년 시조 와 시 를 썼으며, 1937년 신석초,윤곤강,김광균 등과 동인지 을 발간하여 등의 상징적이면서도 서정이 풍부한 목가풍의 시를 발표했다. 그의 시작발표는 주로 을 통하여 1941년까지 계속되었으나, 시작 활동 못지않게 독립투쟁에도 헌신, 전생애를 통해 17회나 투옥되었다. 1941년 폐를 앓아 성모병원에 입원,잠시 요양했으나 독립운동을 위해 1943년 초봄, 다시 북경으로 갔다. 그해 4월 귀국했다가 6월에 피검, 북경으로 압송되어 수감 중 북경 감옥에서 옥사했다. 유해는 고향 뒷산에 안장되었고 1964년 안동시에 시비가 세워졌다.
2.육사의 작품과 작품세계
① 방랑과 실향의식
이육사 시는 전체(36편) 놓고 볼 때 향수의 미학으로 점철되어 있는 시가 상당수에 이른다. 육사의 행적으로 볼 때 그가 정확히 고향을 떠난 것은 결혼(18세) 후였으니 그가 41세로 생을 마칠 때까지 고향은 늘 마음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여기저기 떠돌아 다녔지만 그의 마음의 중심은 고향이었다. 고향을 그는 현실적으로 상실했기에 육사는 언제고 다시 회복할 고향, 나아가서는 조국을 생각했던 것이다.
육사의 시 가운데「청포도」를 비롯하여「연보」,「자야곡」,「강 건너간 노래」,「초가」,「소공원」등에서 향수의 미학을 찾을 수 있다.
고향을 두고도 육사의 인생 역정은 본의 아니게 방황을 거듭했다. 구국운동의 목표를 위해서 중국을 많이 드나들었다. 결국 마지막 눈을 감은 곳도 중국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의 생애는 는 떠돌이 생애였다. 그의 시「노정기」에서 인생 역정을 바다에 떠가는 배에 비유하여 그 어려움을 아주 실감나게 그렸다. 육사의 행각이「노정기」의 배처럼 비참할지라도 돌아간 안식처는 늘 있었다. 그 곳이 고향이었다. 이러한 고향을 두고 그는 늘 즐겁게 떠돌아 다녔던 것이다. 육사의 대부분의 시는 그가 고향을 떠나 목적 달성을 위하여 여기저기 방황하는 동안 실향의식에서 좋은 시를 썼다고 볼 수 있다.
내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참고문헌
참고문헌
강창민(2002), ‘이육사 시의 연구’, 국학 자료원.
김봉군 외 2명(2001), ‘한국 현대 작가론(증보 3판)’, 민지사.
김희곤 (2000), ‘새로 쓰는 이육사 평전’, 지영사.
심원섭(1986), ‘원본 이육사 전집’, 집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