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종원柳宗元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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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유종원柳宗元보고서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 유종원柳宗元 ◎
하나!) 유종원의 생애
대종(代宗) 대력(大曆) 8년(773)에 태어나 헌종(憲宗) 원화(元和) 4년(819)에 사망했다. 자는 자후(子厚)이며, 유주자사(柳州刺史)를 지냈기에 유유주(柳柳州)라 부른다. 원래 하동(河東 : 지금의산서 영제현(山西 永濟縣)) 사람이었으나, 부친이 전란을 피해 오(吳)로 옮겨와 오군(吳郡) 사람이라 할 수 있겠다. 유종원은 하급관료 집안 출신이었다. 재주가 남달리 뛰어났던 유종원은 21세 때 시가(詩家)라 불리는 이름 높은 대시인 유우석(劉禹錫)과 함께 진사에 합격하여 20대 중반부터 중앙관직에 진출하였다. 유종원과 유우석은 같은 나이에 함께 공부하며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진사에 합격한 후 유종원은 관료로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교서랑(校書郞)남전현위(藍田縣尉)감찰어사(監察御使) 등을 역임하며, 사회의 전반적 개혁을 주장하던 왕숙문(王叔文)의 총애를 받아 개혁파에 가담하여 활발한 정치적 활동을 전개 하였다. 이 왕숙문은 덕종 말년 번진이 발호하고 환관들이 날뛰는 세태를 보고, 시정을 수습하여 개혁을 감행해야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얼마 후 덕종(德宗)이 병사하고 황태자 이송(李誦)이 왕위에 오르자, 왕숙문은 태자의 신임을 얻고 있었기에 조정을 개혁하려 하였다.
유종원을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으로 천거하여 기밀을 맡는 일에 참가시키고, 백성을 위하는 정치를 계획하며 이전의 여러 가지 폐단을 점차 제거하려했다. 당시 왕숙문과 결사를 맺었던 사람은 경학가(經學家) 육순(陸淳), 사학가(史學家) 여온(呂溫), 대시인 유우석 등인데 모두 유종원과 마찬가지로 정치개혁에 뜻을 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 신흥정치세력은 너무 밖으로 드러나서, 곧 많은 수구신료들과 환관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이들은 세력을 연합해, 왕숙문이 사욕을 탐하여 도당을 만들었다고 집중 공격했다. 왕숙문을 전폭 신임하던 순종(順宗)은 즉위 전에 목병을 앓았는데 즉위 후 건강이 더 악화되어 8개월 만에 태자 이순(李純)에게 양위했으니 그가 바로 헌종(憲宗)이다. 이로써 왕숙문의 정치개혁은 146일 만에 끝나고, 왕숙문은 피살되고 말았다. 이렇게 왕숙문의 개혁파가 보수파들에 의해 제거됨에 따라 유종원도 지방의 하급 관리로 좌천되었으며, 이후 다시는 중앙관직으로 복귀하지 못하고 유주에서 세상을 떠났다.
유종원은 소주자사(邵州刺史)로 좌천되었는데, 임지로 가는 도중 더 강등되어 영주사마(永州司馬)로 가게 되었다. 영주(永州)는 지금의 호남(湖南) 영릉현(零陵縣)으로 당시는 매우 황폐한 고장이었다. 유종원은 정치적 실패를 겪은 후 곤궁한 고장에서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심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는 옛 시인 굴원(屈源)의 근심을 떨치노라(離騷)를 본받아, 많은 글을 지어 우울한 심정을 기탁했다. 그리고 학문과 수양에 몰두하며, 많은 산문을 써서 탁월한 문학적 재능을 분출했다. 그중 우언(寓言)형식을 빌어 풍자한 소품문은 억울한 자신의 심정을 교묘히 나타낸 것이다.
영주에서 십 년을 지낸 후 유종원은 다시 광서성(廣西省) 경내의 유주(柳州)로 옮겨갔고, 그의 친구 유우석 역시 파주(播州 : 지금의 귀주성(貴州省) 경내의 준의(遵義))로 옮겼다. 파주의 생활은 유주보다 더 심각하여 중원의 생활에 습관 된 사람은 도저히 적응할 길이 없었다. 노모가 계시니, 파견지를 바꿔달라고 상소를 올려 간청했다. 다행히도 명재상 배도(裴度)가 집권하고 있던 터라, 유우석의 처지를 동정해 광동(廣東)의 연주(連州)로 보내고 유종원은 그냥 유주로 가게 했다.
유주는 비록 황량하고 외진 곳이나 산수와 풍경이 뛰어나 유종원은 시간이 생기면 항상 산수풍경을 감상하고 명승지를 찾아다니며, 시문 짓기를 즐거움으로 삼았다. 이때 창작된 대부분의 기행문은 모두 유명한 걸작들로, 단순히 풍경만 묘사한 것이 아니고 깊은 정취의 감개무량함을 기탁하여 정서와 문장의 아름다움이 넘쳐나는(情文亦茂) 경지에 이르렀다. 이러한 참신한 풍격은 당대는 물론이고 후세에까지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유종원은 유주에서 4년간 근무하다 병을 얻어 사망했는데, 유주 사람들은 생전의 업적을 기려 사당을 지어 기념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천설(天說)》《비국어(非國語)》《봉건론(封建論)》등을 꼽을 수 있으며 시문집으로는 《유하동집(柳河東集)》(45권) 《외집(外集)》(2권) 《보유(補遺)》(1권) 등이 있다.
둘!) 유종원의 문학세계
유종원의 문학과 문장에 대한 생각은 기본적으로는 한유 자 퇴지(退之). 시호 문공(文公). 회주(懷州) 수무현(修武縣:河南省) 출생. 792년 진사에 등과, 지방 절도사의 속관을 거쳐 803년 감찰어사(監察御使)가 되었을 때, 수도(首都)의 장관을 탄핵하였다가 도리어 양산현(陽山縣:廣東省) 현령으로 좌천되었다. 이듬해 소환된 후로는 주로 국자감(國子監)에서 근무하였으며, 817년 오원제(吳元濟)의 반란 평정에 공을 세워 형부시랑(刑部侍郞)이 되었으나, 819년 헌종황제(憲宗皇帝)가 불골(佛骨)을 모신 것을 간하다가 조주(潮州:廣東省) 자사(刺史)로 좌천되었다. 이듬해 헌종 사후에 소환되어 이부시랑(吏部侍郞)까지 올랐다. 문학상의 공적은 첫째, 산문의 문체개혁(文體改革)을 들 수 있다. 종래의 대구(對句)를 중심으로 짓는 병문(騈文)에 반대하고 자유로운 형의 고문(古文)을 친구 유종원(柳宗元) 등과 함께 창도하였다. 고문은 송대 이후 중국 산문문체의 표준이 되었으며, 그의 문장은 그 모범으로 알려졌다. 둘째, 시에 있어 지적인 흥미를 정련(精練)된 표현으로 나타낼 것을 시도, 그 결과 때로는 난해하고 산문적이라는 비난도 받지만 제재(題材)의 확장과 더불어 송대의 시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사상분야에서는 유가의 사상을 존중하고 도교 ·불교를 배격하였으며, 송대 이후의 도학(道學)의 선구자가 되었다. 작품은 《창려선생집(昌黎先生集)》(40권) 《외집(外集)》(10권) 《유문(遺文)》(1권) 등의 문집에 수록되었다.
와 일치하고 있다. 유종원도 내용중시적인 입장에서 문학의 목적을 도의 천명에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유종원은 한유에 비해 도의 성격을 상대적 포괄적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도와 함께 문의 중요성도 인정하고 있어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유종원은 문학의 의의가 기본적으로 유가적인 도리의 천명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울러 도의 천명은 반드시 훌륭한 문장을 통해서만 이루어 질 수 있다는 사실도 중시했다. 말하자면 문장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 도와 형식이라고 할 수 있는 외형 모두가 중요하다는 다분히 절충적인 입장을 취했던 것이다. 이런 중립적이고 절충적인 입장은 내용인 도에 대한 개념 규정에 있어서도 한유와 차이가 있다. 한유가 유가 사상을 배타적으로 주장하고 고대 유가의 도통을 자기가 계승발양 하겠다고 했던 것과 달리, 유종원은 유가사상에 근간을 두면거도 불교와 노장사상 등 제자백가의 학설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입장을 취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유종원의 고문은 한유에 비해 서정적이고 은유적이며 글의 성격도 다양한 것으로 평가된다. 유종원도 , , 등의 냉철하고 이지적인 논설적 성격의 글을 많이 썼으며, , , , , 등 풍자의 뜻이 강한 이른바 우언문도 많이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