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위한 어른의 이야기 혹은 어른을 위한 아이의 이야기 채인선 동화집 전봇대 아저씨 내 짝꿍 최영대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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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아이를 위한 어른의 이야기 혹은 어른을 위한 아이의 이야기
-채인선 동화집 전봇대 아저씨, 내짝꿍 최영대를 중심으로
먼저 타이틀을 ‘아이를 위한 어른의 이야기 혹은 어른을 위한 아이의 이야기’라고 정한 것에 대해 언급하고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동화집 전봇대 아저씨에서 위의 제목에 일치하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었다. 먼저 표제작인 전봇대 아저씨를 보자. 전봇대 아저씨의 주인공은 전봇대 아저씨와, 전봇대 아저씨를 닮은 나인데, 전봇대 아저씨는 늘 같은 자리에서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나는 그런 전봇대 아저씨를 좋아한다. 나는 전봇대 아저씨를 닮고 싶어 한다. 그래서 꼬맹이 태정이가 전봇대 아저씨에게 낫으로 상처를 입힐 때, 무작정 그 애를 혼내지 않고, 아이의 사연을 전봇대 아저씨처럼 들어주고, 들어주는 것에서 나아가 그 아이의 상처를 따듯하게 감싸준다. 그러면서 주인공인 나도, 주인공에게 고민을 털어놓은 꼬맹이 태정이도 어른으로 커간다. 일종의 통과의례 모티프로 봐도 무방할 듯 하다. 그리고 전쟁이 일어나고 전봇대 아저씨 아래서 같이 어울려 놀던 동무들은 하나 둘 흩어져 간다. 이제는 누구도 전봇대 아저씨에게 말을 걸지 않았지만, 주인공 나는 전봇대 아저씨처럼 훌쩍 키가 큰 청년이 되어 전봇대 아저씨처럼 주위사람들의 고민을 들어준다. 주인공이 전봇대 아저씨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전봇대 아저씨는 무료하다. 그 무료함을 전봇대 아저씨는 개울을 건너는 다리가 됨으로써 극복한 것이라 생각한다. 나무로 태어나 전봇대로 살다가 다리가 되는 전봇대 아저씨는 참 즐거운 생을 산다고 느꼈다. 다리가 되어 개울을 건너는 아이들의 조잘거림을 들으며 전봇대 아저씨는 그 옛날 자신의 발치에서 노는 아이들 자신에게 비밀을 털어놓는 아이들 고자질을 하는 아이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주인공 나도 개울을 건너며 어린 시절 전봇대 아저씨와의 추억과 동무들과의 즐거웠던 때를 기억할 수 있지 않을까?
이처럼 아이의 시선에서 풀어내는 어른스러운 이야기. 이것을 어른을 위한 아이의 이야기라고 나는 정의했기 때문에 제목을 저렇게 정했다. 물론 채인선의 동화가 기존 동화의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어른들이 읽어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독창적인 세계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이들에게는 너무 어려운 동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고도의 상징과 비유, 플롯과 플롯의 알레고리와 인물과 인물 그리고 인물과 대상 간의 관계가 너무 고차원적으로 형성되어 있어서 자칫 어린이 독자들에게는 작품의 본질적인 아름다움에 쉽사리 다가갈 수 없는 요인이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해본다.
다음 언급할 작품은 동화집 ‘전봇대 아저씨’에 수록되어 있는 할아버지의 조끼이다. 할아버지의 조끼는 아이를 위한 어른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할아버지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 생명을 다해서 만들어 주신 할아버지의 조끼를 무척이나 아낀다. 그 조끼를 보며 어머니를 생각하고 그것을 즐겨 입는 것으로 어머니를 느끼려고 하는 점이 무척이나 순수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10월의 어느 날 할아버지는 김장 배추를 심어 놓은 밭에서 꿩한마리를 발견한다. 꿩을 보며 어머니를 생각한다. 그때 어린 아이 소리가 들려서 대문 밖에 나가보니 아이하나가 추위에 떨고 있어서 집으로 데려온다. 아이의 몸이 따듯해지도록 아랫목에 앉혀 놓고 고구마를 건내며 아이가 노는 이야기를 듣는다. 여기서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즐거워하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자신도 아이가 되어 마음껏 뛰어놀고 싶다고 볼 수 도 있고 나아가 어린 시절로 돌아가 그리운 어머니 품에 안기고 싶은 할아버지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지나친 억측일까? 할아버지는 아이를 보며 기분이 좋아져 도깨비 이야기도 들려주고 귀신이야기도 들려준다. 그리고 아이가 집에 돌아가야 한다고 할 때 할아버지는 그 아이를 잡고 싶어 한다. 할아버지는 추위에 떠는 아이에게 조끼를 벗어준다. 필자는 이 부분에 의미를 두었는데, 아이가 할아버지 곁을 떠나는 것은 할아버지의 순수한 마음 그러니까 육신에 깃든 할아버지의 영혼이 할아버지의 몸을 떠나는 것으로 보았고, 그 마음에 아끼는 조끼를 입혀주는 것으로 할아버지의 길었던 삶이 완성되어 이제는 진정한 어머니의 곁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물론 동화의 내용상 표면적으로는 꿩이 사람으로 변해서 할아버지를 찾아왔다가 돌아가는 것이지만 내가 이 작품을 읽으며 그런 의미를 두었다는 것이다. 아이가 돌아가고 다음 날 새벽녘에 할아버지는 조용히 숨을 거둔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얼굴에는 전날의 미소가 서려있다. 장례가 끝나고 할머니는 감나무에서 할아버지의 조끼를 발견한다. 그러나 그 조끼는 이제 할아버지를 위한 어머니의 조끼가 아니라 할머니를 위한 할아버지의 조끼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조끼의 주인은 이제 할아버지가 아닌 할머니가 되는 것이다. 할머니는 조끼를 보며 할아버지를 생각 할 것이고 또 언젠가 어린아이가 겨울날 할머니 집 앞을 서성일 때 조끼를 벗어줄 수도 있으리라. 이렇듯 어른들이 동심을 찾아가는 이야기 즉 아이를 위한 어른의 이야기를 채인선 작가는 하고 있는 듯 하다. 다음 소개 할 작품도 비슷한 맥락의 작품이다.
다음으로 언급할 작품 역시 동화집 ‘전봇대 아저씨’에 수록 된 학교에 간 할머니라는 작품인데, 이 작품의 주인공은 선미와 할머니이다. 할머니는 항상 선미에게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신주머니 잘챙겨라.” “공부 잘해! 선생님한테 야단맞았다는 말 들으면 이 할미는 화가 난다고.” “다른 애가 한 대 때리면 너는 두 대 때려야 한다. 세 대 때리면 너는 네 대 때려야 한다.” “집에 올 때는 개구멍으로 오지 말고 꼭 돌아와야 한다” 전봇대 아저씨 p55.56
등등. 그런데 그중에는 어른스럽지 못한 잔소리들도 많다. 어느 날 선미가 몸이 아프자, 할머니는 선미를 대신해서 학교에 간다. 할머니는 학교에서 항상 선미에게 했던 잔소리들을 자기 자신도 어기기 시작한다. 반 친구와 떠들다가 선생님에게 혼이 나고, 반장과 싸우기도 하고, 개구멍으로 가려다가 수위아저씨에 붙잡혀 혼 줄이 나기도 한다. 할머니가 학교에서 겪은 헤프닝들이 독자로 하여금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현실에서 실현 불가능한 일이지만 있을 법한 이야기로 만들어 낸 개연성도 좋은 것 같다. 그리고 이런 내용을 어린이 독자가 읽어도 충분히 재미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정작 자신조차도 지키지 못하는 잔소리를 늘어놓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독자는 교훈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어른이라서 꼭 다 옳은 것은 아니고, 어른들도 결국은 아이들과 같은 상황에서는 똑같이 행동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학교에 다녀온 할머니는 선미에게 질책을 받고 부끄러워져 선미가 누웠던 자리에 눕는 것으로 동화는 끝이 나는데, 이러한 어른스럽지 못한 어른의 모습이 아이를 위한 어른의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다음으로 언급할 작품은 “전봇대 아저씨”에 수록되어 있는 우리집 안경곰 아저씨이다. 이 동화는 다툼이 심한 자매의 이야기이다. 주인공은 동생인데, 언니와 싸우고 엄마한테 고자질을 하자, 엄마는 고자질이 더 나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엄마에게 고자질 하고 싶은 날에는 어떻게 하냐고 물어보자, 엄마는 안경 곰 아저씨에게 일러주라고 말한다. 단 조용조용 말해야 한다고 한다. 나도 언니도 싸우고 난 후에 안경 곰 아저씨에게 조용조용 고자질을 하다 보면 아저씨의 눈을 보고 웃음을 터트리고 만다. 그 웃음은 그냥 웃음이 아니라 용서와 이해의 웃음일 것이다. 어쩌면 반성의 웃음이라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이 동화는 매우 짧은 동화이다. 하지만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큰 것 같다. 어린 자매는 언니 혹은 동생과 싸운 이야기를 조용조용 안경 곰 아저씨에게 말하는 것 만으로도 기분이 풀리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언니 혹은 동생을 이해하게 된다. 자아성찰이라고 볼 수 있을까? 내면을 무생물인 안경 곰 아저씨에게 털어 놓는 것으로 반성과 이해를 할 수 있다는 점을 발견한 작가의 시선이 놀랍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작품은 ‘내짝꿍 최영대’이다. 내짝꿍 최영대에서 주인공은 영대라는 아이 인데, 영대는 어머니가 안 계신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말도 잘 하지 못하고 항상 더러운 옷만 입고 다닌다. 그런 영대는 당연하게 아이들의 기피대상이 되고 점점 놀림과 괴롭힘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영대는 반항 한번 하지 않고 눈물 한번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은 그런 영대를 더욱 심하게 괴롭힌다. 선생님은 그런 아이들을 말려보지만, 나중에는 선생님 역시도 영대를 포기해버린다. 영대를 향한 괴롭힘은 더욱 심해진다. 그러던 중 수학여행을 가게 된다. 영대도 어린이이기 때문에 들뜬다. 하지만 수학여행 첫날 밤, 아이들은 영대를 놀리기 시작한다. 선생님도 거기에 일조한다. 영대는 그만 울음을 터트려 버린다. 그 울음은 진정한 절망의 울음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영대는 바랐을 것이다. 수학여행에서만이라도 아이들이 자신을 괴롭히지 않기를. 모두가 즐거운 수학여행에서 마저 놀림과 괴롭힘을 당하며, 영대는 어떤 희망도 없다고 생각하고 울음을 터트렸던 것일까? 그 울음은 누구도 그치게 할 수 없었다. 솔직히 나는 선생님도 같이 벌을 받아야 옳다고 생각했다. 영대에게 그 누구보다 가혹했던 것은 아마 선생님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영대를 따라 반 아이들 모두 울음을 터트렸고, 다음 날 아이들은 부쩍 점잖아졌다. 아이들이 영대의 눈물의 의미를 깨달았기 때문일까? 어쩌면 어른보다 아이들이 더 진심을 느끼기 쉬운 존재라는 생각도 해본다. 백지장처럼 순수한 아이들의 마음에 영대의 마음이 잘 그려졌던 까닭이었을까. 아이들이 영대에게 기념배지를 달아주는 모습에서 아이들이 영대에게 느끼는 감정이 잘 표현 되었다는 생각이다. 미안하다거나 사이좋게 지내자거나 하는 것보다 상징적인 행위로서의 사과가 더욱 사람의 마음에 잘 와 닿는 것 같다. 이제 영대는 외롭지 않을 것이다. 아이들 모두가 영대를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었으니까.
채인선의 동화는 권선징악의 기존의 동화의 틀에서 조금은 비켜나 있는 점이 매력인 것 같다. 하지만 내용이 어린이들이 보기에는 약간 난해한 점도 없지 않다는 점이 조금 아쉽다. 하지만 어른이 보기에도 좋은 동화란 점에서 높게 평가하고 싶다. 이 동화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