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와 주변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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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명성황후와 주변인물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1. 명성 황후(明成皇后/1851 - 1895)의 생애
조선 고종의 비, 16세 때 대원군의 부인 민씨의 추천으로 고종의 비가 되었다. 대원군이 역대의 세도 정치를 근절할 목적으로 가문이 외롭고 단출한 민씨 집안에서 왕비를 택하였 으나, 1873년에 왕자 척(拓)을 낳은 후 명성황후의 친족이 정권을 잡으려 했으나 대원군이 이를 막기 위하여 궁녀 이씨의 아들을 태자로 세우려 하자 양자의 싸움에 명성황후는 드디어 대원군을 탄핵하고 고종으로 하여금 직접 정사를 돌보도록 한 후, 끝내는 대원군 일파를 모두 쫓고 나라의 문을 열어 일본과 수교했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청나라에 도움 을 청해 대원군을 청나라로 납치해 가게 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으로 민씨 일족이 실각하자 다시 청나라를 끌어들여 개화당 정권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김홍집 등의 친일파가 정권 을 잡게 되자 러시아 힘을 배경으로 세력을 펴 친일파의 세력을 물리치려 하다가 1895년 을 미 사변 때 일본 공사 미우라의 부하들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었다. 1897년에 명성황후라는 시호가 내렸다.
2. 명성 황후에 대한 역사적 평가
명성 황후에 대한 평가는 20여 년에 걸친 그의 집권기에 시행된 정책과 그 결과를 바탕으로 냉정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명성황후를 정점으로 하는 민씨 일족이 집권한 1873년부터 1895년까지는 우리 나라로서는 정말 중요한 시기였다. 밀려드는 서양 열강, 뿌리부터 흔들리 는 봉건체제, 새로운 변화를 구하는 움직임, 이런 다양한 세력들이 얽히고 설키면서 임오군 란 , 갑신정변, 동학농민 운동 같은 사건들이 일어났다.
대원군의 정책이 쇄국이었던 반면에 명성황후의 대응책은 문호개방이었다. 명성황후는 1876년 일본과 맺은 강화도조약(병자수호조규)을 시작으로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과 차례로 수교를 맺었다. 명성황후에게 서양 열강과의 수교를 적극 권한 장본인은 청의 북양대신 이홍장이다. 조선에서 청의 기득권을 지키고 서양세력을 끌어들여 일본의 독주를 막으려는 생각에서였다. 오랑캐로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청의 이른 바 이이제이정책이다.
어찌되었든 문호개방을 한 조선의 당면 과제는 자주적인 근대화를 이루는 일이었다. 서양 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병과 산업 진흥을 꾀하는 동시에 낡은 봉건제도를 허물고 새로운 질서를 세워야 했다. 명성황후와 민씨 정권은 이 중 어느 것 하나도 충실히 해내지 못 했다. 그 결과 어느 세력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 개화 반대를 외치며 임오군란에 참가한 군 중은 명성황후를 공격의 표적으로 삼았고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도, 동학농민군도 모두 명성황후와 민씨 일족 타도를 외쳤다. 어느 쪽의 지지도 받지 못한 명성황후는 외세에 의지 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명성황후로 하여금 재집권케 해준 것은 청나라였다. 동학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청에 지원군을 청하여 일본군 상륙의 빌미를 제공하고 그 결과 우리 땅에서 청일 전쟁이 벌어지게 한 장본인은 바로 명성황후였다.
청일 전쟁이 우리 땅에서 벌어지게 된 이유는 동학농민 운동 때문이 아니라 명성황후가 이끄는 민씨 정권의 부패와 무능, 외세의존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미우라 - 일본의 군인 ·정치가.
국적 : 일본
활동분야 : 군사, 정치
출생지 : 일본 조슈한[長州藩]
조슈한[長州藩] 출생. 막부(幕府)타도운동에 참여하고,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후 신정부의 군인이 되었다. 1878년 육군중장, 1888년 예편 후 1890년에 귀족원 의원, 1895년 주한공사로서 한국에 부임한 그는 10월 8일 새벽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기 위하여 일본군과 경찰 및 낭인(浪人)들을 동원하여 명성황후 (明成皇后)를 시해하고 그 시신(屍身)을 불태우는 국제적 범죄를 저지른 범인이다. 그는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시해된 황후가 궁궐을 탈출한 것처럼 위장하여 폐서인조칙(廢庶人詔勅)을 내리도록 하였다.이러한 사실은 당시 궁궐에 있던 미국인 다이(M.W.Dye:쒀伊)와 러시아인 기사사바틴(H.N.Sabatin)이 현장을 목격함으로써 알려지게 되었다. 때문에 소환되어, 일시 투옥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1910년 추밀고문관(樞密顧問官)이 되었다. 이후 계속하여 정계의 배후조종자로서 활약, 1924년 이른바 호헌삼파(護憲三派:憲政 ·政友 ·革新俱樂部) 성립에 진력하였다.
흥선대원군 - 조선 후기의 왕족 ·정치가.
호 : 석파(石坡)
본명 : 이하응(李昰應)
별칭 : 자 시백(時伯), 시호 헌의(獻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