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 인왕경 舊譯仁王經 표기체계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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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구역인왕경(舊譯仁王經)』표기체계의 이해
Ⅰ. 서언
중국의 한자(漢字)는 고대 동아시아의 유일한 문자로서 당시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아직 자국(自國)의 언어를 소유하고 있지 못한 국가들에게 한자 수용(受用)은 정치, 문화 등의 사회 전반적인 영역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 본다. 그러나 본래 한자라는 것이 중국어를 표기하기 위하여 발달된 문자라는 점에서 볼 때, 문자 수용에 강한 필연적인 동기와 연유(緣由)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중국어를 언어(言語)로 사용하지 않는 나라들은 언문이치(言文二致) 언어(言語)와 글을 쓰는 언어(文語)가 오랫동안 불일치되는 기형적인 상태를 20세기 초엽의 학자들은 언문이치라(言文二致)는 말로 불렀다. 이기문, 『國語史槪說』,태학사, 2005
상태에서 비롯되는 수많은 문제들이 발생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은 쉽게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대략 AD4,5세기 경에 우리나라 또한 처음으로 한자를 도입하여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창제되기 전까지 한자 이 외에 언어(文語) 차이로 비롯되어 발생하는 문제에 명확한 대안(對案)이 부족했기에 그에 따라 발생하는 곤란한 상황에서 분명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고 이런 불편한 문자생활을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이 노력은 결국 세종 25년(1443) 훈민정음 창제라는 열매를 맺게 되었고 비로소 우리 민족의 언어가 한문자로 이루어지던 문자생활에서 우리말과 같은 어순(語順)으로 된 문자생활로 전환되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자가 도입되어 훈민정음이 장체 되었던 사이 우리의 말과 글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서 우리조상들이 착안해낸 것 중에 하나가 바로 ‘구결(口訣)’이라는 것이며, 아직 그 전모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고대 한국어 말기의 곡용활용 어미 등을 보여주는 고려 불경 구결 자료로 연구가 진전된 것 중 문수사(文殊寺, 충청남도 서산군)의 금동아미타여래좌상(金銅阿彌陀如來坐像)의 복장물(腹欌物) 가운데 발견된『구역인왕경(舊譯仁王經)』이 바로 그것이다.
Ⅱ. 구역인왕경(舊譯仁王經)의 표기체계
1. 훈민정음 창제 이전의 구결 모습
훈민정음이 창제 이전 한자를 이용해서 우리말을 적기 위한 차자표기(借字表記) 자료는 거의 대부분 단어 관련 자료만 보여주던『계림유사(鷄林類事)』나,『조선관역어(朝鮮館譯語)』정도 뿐이었다. 그러나 1973년『구역인왕경(舊譯仁王經)』권상(5장)이 발견되면서 부 터 1990년대 초반에『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권14『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권20,『대방광불화엄경소(大方廣佛華嚴經疏)』권35,『금광명경(金光明經)』권3 등의 석독구결(釋讀口訣) 자료와 그 밖의 음독구결(音讀口訣) 자료가 속속 발견되어 연구가 축적되면서부터 고려시대 더 정확히는 12세기 초에서 13세기 후기에 이르는 우리 국어의 실상을 좀더 분명히 알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김영배, 『大覺思想』5집, 2002
또한 우리는 이 자료를 통해 고려시대에 행해진 이 석독구결이 조선 초기 번역(언해) 과정을 알 수 있는『능엄경언해(楞嚴經諺解)』에 까지 그 맥을 잇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윤용선, 『15세기 언해자료와 구결문』역락, 2003
2. 구역인왕경(舊譯仁王經)과 석독구결(釋讀口訣)
2.1 『구역인왕경(舊譯仁王經)』발견경위
『구역인왕경, 상 (舊譯仁王經, 上)』5장 낙장(落張)은 한문의 원문 좌우 행간에 작은 글
씨로 깨끗하게 토(吐)가 기입된 석독구결(釋讀口訣) 자료이다. 이는 1973년 충남 서산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