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이黃眞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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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황진이黃眞伊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1. 황진이의 생애
황진이는 조선 시대의 명기로, 본명은 진(眞), 일명 진랑(眞娘), 기명(妓名)은 명월(明月)이다. 황진이의 생존 연대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황진이와 사귀었다는 사람들의 일화와 이덕형의 「송도기이」를 통해 연산군 말년 경(1502)에 나서 중종 35년 경(1540)에 40미만의 젊은 나이에 죽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황진이의 일생에 대해서는 간접사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모두 각양각생으로 이야기를 전하고 있으며 신비화시킨 흔적이 많아 그 허실을 가리기가 어렵다.
2. 황진이의 이야기들
- 황진이가 황진사의 서녀였다는 설과 맹녀현수(盲女絃首)의 딸이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그가 황진사의 서녀였다는 설은 「송도기이」에 구체적으로 전해지며, 다른 기록들에도 비슷한 내용들이 있다. 그가 맹녀현수의 딸이었다는 설은 「식소록」, 「조야휘언」에 전해지는데, 황진사의 서녀라는 설에 비해 기록이 적다. 그러나 황진이가 황진사의 서녀였다는 기록은 ‘해산때에 이향(異香)이 방 안에 가득하였다’, ‘사람들이 그녀를 선녀라 불렀다’ 등의 허구적인 내용이 많아 신빙성이 적으며, 그녀가 기생이라는 점으로 보아서도 맹녀현수의 딸이라는 기록이 좀 더 신빙성이 있게 여겨진다.
- 여기에도 두 가지 설이 있다. 황진이가 15세 때에 옆집 총각이 담 밖에서 몰래 황진이를 훔쳐보고 그 자태에 매혹되어 혼자 애태우다가 병이 들어 죽었는데, 그 상여가 황진이의 집 앞에 이르자 움직이지 않아, 황진이의 저고리를 얻어다 관을 덮어 주자 그제서야 상여가 움직였다. 이 일로 인해 황진이가 기문에 들기로 결정했다는 것이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황진이가 양반의 집과 혼담이 있었으나 서녀라 하여 혼담이 이루어지지 않자 일종의 반발로서 기류에 투신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이야기 모두 확실한 것은 아니다. 앞의 이야기는 한말에 나온 「숭양기구전」에만 있고, 뒤의 것은 그나마 야담으로 전해질 따름이다. 황진이가 왜 기생이 되었는가 하는 것은 앞에서 말한 것 같이 그녀가 맹녀현수의 딸이라는 설에서 더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 황진이와 가장 오랫동안 동거한 사람은 선전관(宣傳官) 이사종(李士宗)으로 6년간 계약동거를 하였다. 이사종 역시 대단한 명창이었으며, 처음 3년간은 이사종의 집에서 황진이가 생활비를 책임졌으며, 다음 3년간은 황진이의 집에서 이사종이 생활비를 책임졌다. 약속한 6년이 다 되자, 황진이는 “일은 이미 끝났으니 마땅히 우리는 헤어져야 한다.”고 하면서 미련없이 이별하였다고 한다.
- 종실(宗室) 벽계수라는 사람이 “사람들이 한번 진랑이를 보면 빠져버리나 나는 혹하지 않을뿐더러 마땅히 쫓아버리겠다.”고 호언장담을 하며 송도로 내려왔다. 벽계수가 말을 타고 만월대를 지나가는데, 황진이의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하는 노래가 들려 뒤를 돌아보다 말에서 떨어졌다. 이에 황진이는 웃으며 “명사가 아니라 한낮 풍류랑이다.”하며 돌아갔다고 한다.
- 소세양(蘇世讓, 1486~1562)의 호는 양곡(暘谷) 또는 퇴휴당(退休堂)이라고 한다. 그는 시문으로 저명했으며 중종 4년에 등과하여 문형(文衡一大提學)을 지낸 바도 있는 명사였다. 그는 당대 남자들이 미색에 미혹되는 것을 보고 자기는 황진이와 꼭 삼십일만 지내다가 미련없이 떠나오겠다고 친구들과 약속한 후, 황진이와 삼십일을 지냈지만 황진이가 읊는 를 듣고 다시 머물렀다고 한다.
- 이생은 재상의 아들이라고만 되어 있을 뿐 누군지 불명확하지만 위인이 호탕하여 황진이가 금강산 유람차 동행을 요구했을 때 자진해서 나섰다. 애초에 단 둘이만 떠났으므로 그는 식량을 지고 다녔는데, 시간이 오래 되어 가지고 온 식량이 다 떨어졌다. 하는 수 없이 이 곳 저 곳에서 걸식을 하며 다녔는데, 황진이가 몸을 팔아 식량을 얻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생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 지족선사는 송도 근교 깊은 산 속 암자에서 30년간 면벽수도를 해온 스님이었다. 송도 사람들은 그를 모두 생불(生佛)이라며 존경하였다. 황진이는 하얗게 소복을 하고 찾아가 자기는 청상과부라며 스님의 제자가 되겠노라 애원했다. 선사는 스스로를 나무라고 염불을 외며 진이를 외면했지만, 나중에는 황진이가 비를 맞아 착 달라붙은 옷으로 살결을 드러내며 유혹해오는 데에는 넘어가고 말았다. 그 후 지족선사는 법복도 염주도 다 내동댕이치고 황진이를 찾아 헤매었고, 이후로는 그의 생사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 서경덕(徐敬德, 1489~1546)의 호는 화담(花潭) 또는 복재(復齋)라고 하고, 시호 문강(文康)이며 부위(副尉) 서호번(徐好蕃)의 아들이다. 화담이라는 호는 그가 송도의 화담에 거주했으므로 사람들이 존경하여 부른 것이다. 가세가 빈약하여 독학으로 공부하였고, 주로 산림에 은거하면서 문인을 양성하였으며, 과거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 서화담은 당시 도학군자로서 학덕과 인덕이 널리 알려진 위인이었는데, 황진이의 유혹에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 날 그녀는 화담정사에 놀러갔다가 돌아갈 시간이 되어 복통을 일으켰다. 서경덕은 그녀를 한 채밖에 없는 이불에 눕히고 자기는 늦도록 책을 읽었다. 꾀병을 앓으면서도 곁눈질로 서경덕의 동태를 살폈으나 그는 여전하였다. 마침내 날이 밝자 황진이는 자기의 연극을 부끄러이 여기며 “선생님, 송도에는 삼절(三絶)이 있는데 그것을 아십니까?”하고 물었다. 서경덕이 무엇이냐고 묻자 “첫째는 박연폭포요, 둘째는 선생님이시고, 셋째는 진이입니다.”하니 서경덕이 “이 비록 선학(善謔)이나 또한 진리라.”하며 웃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