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이후 서북지방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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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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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1. 구한말 이후 ‘서북지방’의 의미
서북 지방은 몇 가지 특이한 역사적 상황을 가지고 있다. 먼저 조선을 건국한 지역이면서도 조선의 역사 내내 중앙정부로부터 정치적 차별과 소외를 당한 지역이다. 그래서 항상 저항적 지성과 의식들이 전지역적 민심으로 자리 잡고 있다. 게다가 지형적으로 산악이 많아 농업발전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토지를 기반으로 하는 양반사족들이 정착하기 쉽지 않았고, 정치적 소외가 심하여 관리 진출이 막힌 곳이기에 그들이 성장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양반 계층들이 주도하는 성리학적인 신분제 향촌질서가 성립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보수적이지 않고 개방적이며 자유로운 관계는 인심이 좋은 지역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게 했다.
여기에 강인한 도전성과 개방성을 가진 상업적 중산층이 성장한 지역이다. 지형적인 조건과 국경적인 요소와 중앙정부로부터 소외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국경의 관무역(官貿驛)과 사무역(私貿驛)을 통하여 상업적 중산층이 성장하다 보니 서북지방은 중상적 분위기가 팽배하였다. 이들은 상업적인 이익을 추구하며 진취성과 개방성을 갖고 도전하는 자들로 국제적인 감각과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외국과 무역을 하는 상인들이기에 만주어와 한문에 능통하였으며, 여기에 중앙정부로부터 차별과 소외의 결과 저항적 지식인들이 학인적 자질을 개발하여 새로운 지식에 대한 개방성으로 발전하였고, 경기 삼남지방과 달리 독립적 의식이 강한 독서층으로 성장해 있었다. 이들은 향촌 교육에 앞장섰고, 조선후기 정부가 보통교육을 일으킬 때 독서인으로서 개혁적 지식 활동을 한다.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서북인 대부분은 한문이나 한글을 해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서북지방 사람들은 개방적이고 진취적이며 독립적이고 환경에 적응능력이 강인하게 훈련되어 있고, 조선후기사회의 모순 개혁에 걸림돌인 신분제 사회질서가 강력하게 적용되지 않는 대체로 자유로운 공동체를 형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 지역이 문자 해독 능력이 높은 학문적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여기에 중상적 사회경제의 구조는 상업 유통망을 통한 정보전달이 체계화되고, 새로운 것에 대한 수용이 일상적으로 가능한 지역이었다. 특히 조선의 정치ㆍ사회ㆍ문화적인 주변부로서 소외당하고, 상업적 발전의 수탈구조로 이해하는 지방관청 관리들의 횡포에서 벗어나려는 저항적 독립의식이 언제나 사회저변에 잠재되어 간간히 표출되었다. 이런 저항적 독립의식은 새로운 사회에 대한 기대심으로 이어졌다. 류순규, 「서북지방 개신교 수용에 나타난 사회적 토대와 역사성에 관한 연구」, 칼빈대학교 신학대학원 석사 논문, 2004.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었고, 이는 교육구국운동의 선봉에 서울과 함께 서북지방이 설 수 있는 요인이 되었다. 대표적인 학회로는 서우학회와 한북흥학회가 통합된 서북학회를 들 수 있다. 서북학회는 교육계몽운동에 앞장섰으며, 서북협성학교를 설립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는데, 이는 광범위한 대중 교육이었다. 서북협성학교는 처음에 1년 과정의 사범속성과로 출발하여 교사양성에 주력하였다. 이는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에 있어서 시급한 것이 인재를 가르칠 교사양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교과과정은 산술ㆍ地誌ㆍ역사ㆍ법률ㆍ물리학ㆍ교육학ㆍ영어ㆍ작문ㆍ일어 등으로 신사상ㆍ신지식을 고취시키는 것이었다. 서북학회는 1908년에는 수상야학을 운영하고, 1909년에는 농림강습소를 설치하기도 했다.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면서 서북학회의 방향은 각각의 논리에 따라 운동방향을 달리한다. 첫째, 일진회, 대한협회, 서북학회의 연합, 즉 삼파연합운동(三派聯合運動)이다. 서북학회는 단순한 학술단체임을 내세워 연합 초기에 이탈하였지만 3파연합의 가능성을 내포한 것만으로도 학회성질의 변화가능성을 짐작할 수 있다. 둘째, 1909년 8월에 안창호의 발의에 의해 청년들이 인격수양과 애국심 함양을 위해 청년수양단체인 를 설립하였다. 안창호 등은 막연한 실력양성론의 입장에서는 먼저 민족성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먼저 인격수양을 이룬 후에 실력양성을 통하여 자강을 이루면 독립의 기회가 왔을 때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모든 민족구성원이 인격수양을 해야 하는데 우선 이 운동을 이끌어 갈 지도자 양성을 위해 청년학우회를 설립한다는 것이다. 셋째, 이동휘 등 무장출신인사들 대부분은 1909년에 이르러 신민회의 일부인사들과 선실력양성론의 한계를 지적하였다.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독립전쟁준비론(獨立戰爭準備論)을 제시하고, 이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자 이 일에 적극 가담하여 이후 국외 무관학교건설과 독립군기지건설에 참여하였다. 이성열, 「대한제국 말기 일본인 학무관료의 교육관섭과 한국인의 교육구국운동에 관한 연구」, 성균관대 대학원 박사 논문, 2002.
2. 백철의 『조선신문학사조사』의 특성과 약점
백철은 개화기부터 해방직후까지를 기술범위로 설정한다. 근대의 기점을 1894년 갑오경장으로 설정하고 문학사를 이 시기부터 기술한다. 백철은 신소설을 근대문학의 성격을 가진 것으로 보고 상세히 기술한다. 즉 자유주의라는 근대사조의 유입으로 신소설이 창작되었다는 것이다. 백철은 이를 내용ㆍ형식적 측면에서 기술하기보다는 그 주체의식에서 근대문학이 출발되었다고 본다. 기술방법으로는 G.Brandes로부터 영향받은 사조와 함께 실증주의적 태도를 견지한다. 이에 따라 풍부한 작가, 작품을 소개하여 이후의 문학사 기술에 필요한 자료제공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평가가 결여되어 가치판단이 유보된다는 점에서는 한계를 지닌다.
백철은 해방직후 문단의 중간파로 자처하여 좌우익문단으로부터 비판의 대상이 되자 또 하나의 비평적 활동으로 문학사를 기술한다. 여기에는 새로움을 추구하는 그의 비평적 기질과 『十九世紀文學主潮史』의 영향, 그리고 개인사적으로는 교수재직에 따른 교육적 목적도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근대에 대한 개념은 서구화와 동일시한다. 이것은 이미 이전 시대 임화의 『新文學史』에서 주장한 것을 받아들였던 듯하다. 각 시대구분은 사조를 바탕으로 시도된다. 그 사조는 일반적 시대사조와 문예사조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백철은 이를 혼용하여 시대를 구분한다. 또한 현대의 기점을 1924년 신경향파 이후로 보고 있다.
현대문학적 성격에서는 백철이 KAPF에 의해 주도되는 프롤레타리아문학을 그 중심에 둠으로써 해방이후 자칫 이데올로기에 의해 의도적으로 연구대상에서 제외될 위기를 모면케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더욱이 이는 문학사뿐만 아니라 『한국근대문예비평사 연구』와 같은 비평사의 기술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백철의 문학사는 풍부한 작가, 작품을 소개하고 KAPF에 대해 문학사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는 데 장점이 있다. 반면 서구문예사조와 한국문학을 무분별하게 적용한다는 문제점을 가진다. 윤순재, 「해방이후 근현대문학사 비교 연구 : 백철의 『조선신문학사조사』와 조남현의 『한국현대문학사』를 중심으로」, 홍익대 대학원 석사 논문, 2000
3. 1920년대 지식인의 사상분화 김형국, 「1920년대 한국 지식인의 사상분화와 민족문제 인식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논문, 2003. 요약
먼저, 1920년대 문화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의 민족문제 인식과 운동론의 토대를 이루는 개조사상의 수용배경과 그 양상을 검토해보자. 1920년대 식민지 조전 지식인들은 낙관적인 국제정세 인식을 바탕으로 민족 문제 해결의 새로운 도구로 ‘개조사상’을 수용하고 있었다. 당시 개조사상은 개조의 지향점과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이해 정도에 따라 문화주의와 사회주의적 개조사상으로 구분할 수 있다.
문화주의를 수용한 자유주의적 지식인들은 ‘내적 개조’와 ‘인격 가치’의 실현을 통한 신문화의 건설과 사회의 개조를 지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수용된 문화주의의 특징은 일본의 문화주의와는 달리 개조의 문제를 개인에게만 한정하지 않고 민족 단위로 확장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즉, ‘내적개조’와 함께 ‘민족개조’를 제기하고 있었다.
이는 이미 1910년대 문명개화론자들이 주장했던 구관습 타파운동과 동일한 맥락인데, 문화주의 관점에서 이를 재해석하여 부각시키고 있다. 즉, 진정한 문화의 실현을 위해서는 민족적 자각과 민족성의 개조가 필요하다는 논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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