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동 6주 획득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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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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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강동6주 획득♣
1. 서론

* 고려와 거란 송의 관계
고려의 기본적 대외정책은 북진정책과 친(親)송 정책 이다. 태조 왕건은 훈요10조를 빌어 거란을 금수와 같은 국가라 칭하며 거란을 멀리했으며 친송 정책을 펼쳤다. 거란과 송은 북경 이북에서 요동반도 사이에 있는 연운16주 지역의 문제를 둘러싸고 적대 관계였다. 그리하여 거란은 송을 치기 위해 우선 고려를 견제할 필요성을 느끼고 993년 고려에 1차 침입을 시도하였다.
2. 본론
* 1차 침입
1차 침입시 고려에서는 화친론과 주전론으로 나뉘어진다. 화친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서경 이북 땅을 주고 항복하자고 주장하였다. 그 의견을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선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내사시랑중군사 서희 ) ) 서희: 고려 초기 의 문신이자 외교가. 993년에 거란이 침입하자 중군사로 적진에 들어가 적장 소손녕과 담판하여 거란군을 돌려보냈다. 994년에는 청천강 이북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곽주, 귀주등제에 강동 6주를 설치하여 압록강까지 나아가기 위한 전략기지로 삼았다. 이후 태보 내사령을 지내다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었다. 서희는 이지백 등과 함께 항전을 주장하였고 성종도 이에 따르게 되었다. 그런데 마침 소손녕이 안융진을 공격하다 실패하자 화친의 분위기가 일어났고 서희가 소손녕을 만나기로 하였다. 여기서 소손녕은 고려를 침략한 이유로 첫째, 고려가 신라땅에서 일어났는데 자기 땅인 고구려를 침식하고 있으며 둘째, 이웃인 거란을 버리고 송나라와 교류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이에 대해 서희는 첫째,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하여 고려라고 했으므로 요의 동경도 고려의 땅이며 둘째, 압록강 유역도 고려 땅인데 고려가 요와 교류하고자 해도 여진이 있어 불가능하므로 이 지역을 회복하여 성을 쌓고 도로를 확보하면 교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대응하였다. 그 결과 고려는 압록강 동쪽 280리를 개척하는 데 동의를 얻었고, 송나라의 연호 대신 요의 연호를 사용하기로 하였다. 이에 고려는 흥화진통주구주곽주용주철주 등을 획득하여 압록강 유역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결국 요에 제 1차 침략의 목적은 고려와 송나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요와 교류하게 하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었다.
* 2차 침입
고려가 조공의 약속을 지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친송 정책을 유지하고 거란을 멀리하였으므로, 거란 성종은 고려를 완전히 굴복시키고자 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때마침 고려에서 1009년 강조의 정변(政變) ) ) 강조의 정변: 1009년 고려의 왕위계승문제를 둘러싸고 강조가 일으킨 정변.
이 일어나 목종이 폐위되고 현종이 즉위하게 되자 거란은 강조 문죄(問罪)를 이유로 10년(현종 1년) 4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 의주가도의 흥화진을 공격하였으나 양규 등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치자 진로를 바꾸어 통주 부근에서 강조의 군사를 격파하고 강조를 사로잡아 죽였다. 기세를 올린 거란군은 서북 여러 성을 격파하고 평양을 공격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남하하여 개경을 함몰유린하였으며 나주로 피난하였다. 이에 왕은 하공진을 청화사(請和使)로 하여 강화를 요청했는데 강화가 성립되자 요는 개경 점령 후 10여 일 만에 하공진을 볼모로 하여 철군하였다. 이로부터 거란은 고려왕이 친히 내조할 것을 요구하였고 고려는 이를 약속하였다.
* 3차 침입
요나라의 친조(親朝) 요구는 고려로서는 국가의 체면상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문제였다. 이에 왕은 병을 빙자해 친조의 불가능함을 통고하자, 요는 앞서 고려가 차지한 강동 6 주를 반환하라고 요구하여 왔다. 고려는 이를 단호하게 거부하고 요와 국교를 끊었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요에서도 1014년(현종 5)부터 계속하여 6주의 반환을 요구하며 무력침입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 때 마다 패하고 돌아갔는데, 18년(현종 9) 12월 요장 소배압의 총지휘 하에 10만의 군사로 대규모의 재침을 감행하였다. 이때 고려에서는 상원수 강감찬과 부원수 강민첨으로 하여금 20만 군사를 영주에 배치시켜 두었다가 적의 내습의 보고를 듣고 곧 흥화진으로 전진하여 정기 1만 명을 산골짜기에 잠복시키는 한편, 성동대천을 막아 놓은 뒤 적이 이르자 물을 트고 급습하여 크게 무찔렀다. 이에 소배압은 싸움을 피하여 사잇길로 개경을 향해 직행하려 하였으나 곳곳에서 강민첩에게 격파당하여, 그 이듬해 정월 개경 가까운 선은현까지 왔다가 퇴각하기 시작했다. 이때 강감찬은 구주에 군사를 숨겨 두었다가 후퇴하는 적의 대부분을 격파, 대승을 거두었는데 이 싸움을 구주대첩이라 한다. 그 뒤 19년 다시 사절의 왕래가 시작되었고 20년(현종 11) 5월 양국의 국교는 회복되어 고려는 거란의 연호를 쓰고 송과의 관계를 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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