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아퀴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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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토마스 아퀴나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von Aqin)는 기독교의 교리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종합하여 스콜라 철학의 전성기를 맞게 한, 서구사상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상가이다. 또한 사후에 성인의 반열에 오른 그는 철학자이며 신학자였다. 그러한 토마스가 교육과는 어떤 관계에 있을까?
논자는 토마스의 인식론을 중심으로 하여 그의 교육론을 살펴보기로 한다. 지식의 획득과 진리의 추구가 교육의 본질을 이루는 한 부분이라고 볼 때 이러한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 인식론에 대한 고찰은 의미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토마스는 1225년경에 나폴리 근교의 아퀴노(Aquino)라는 조그만 도시의 로카세카(Roccasecca) 성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토마스가 다섯 살이던 1230년에 베네딕트 수도회의 모원인 몬테카시노의 수도원 학교에 보내져 1239년까지 만 10년 동안 기초 공부를 하며 그곳에서 자란다. 그러던 중 1230년대 말 즈음에 교황 그레고리오 9세가 황제 프레드리히를 파문한 사건 등으로 몬테 카시노가 전화(戰禍)에 휩싸이게 되자 토마스의 아버지는 그를 나폴리 대학으로 보내어 공부하게 한다. 여기에서 토마스 자신이 향후 남기게 될 발자취에도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되는 하나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도미니코회와의 만남이 시작된다.
1245년경 그는 파리 대학으로 가서 정식 도미니코 회원이 되려면 거쳐야 하는 수련기를 보내게 되는데 그곳에서 그의 위대한 스승이 될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를 만나게 된다. 이 시기에 토마스는 알베르투스를 통해 신플라톤주의와 만나게 되었고,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방대한 지식도 쌓는다. 그는 1257년부터 2년간 파리 대학교 신학부 교수로 활동하다 1261년에 교황 우르바누스 4세의 오르비에토 궁정에 3년간 체류하면서 교수와 저작활동을 한다. 그는 그곳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라틴어 전집을 완성한 최초의 인물인 빌헬름 폰 뫼르베케와 교제를 함으로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한 지식을 더욱 심도있게 연구하게 되었다. 1266년에 로마의 산타 사비나에 설립된 수도원 학교를 운영하면서 을 집필하게 된다.
1268년부터 3년간은 파리대학교에서 머무르면서 제2부를 비롯하여 방대한 양의 저술을 한다. 1272년 그는 파리 대학 교수직을 떠나 나폴리로 돌아와 도미니코회의 수도원 학교를 설립한다. 의 집필을 속행하고 아리스토텔레스 주해를 계속하다가 1273년말 건강이 현저히 악화되어 일체의 활동을 중지하였다. 1274년 1월 토마스는 리옹에서 개최될 제14차 공의회에 참석하라는 연락을 받고 가던 중 병이 악화되어 포사노바에 있는 시토회 수도원에서 체류하다가 1274년 3월 7일에 임종을 맞게 된다.
이후 토마스는 1323년에 성인으로 추대되었고 1567년 공식적으로 교회박사로 불리게 되었으며 19세기말에 교회는 그를 정통적 주창자로 공표하였다.
그리 길지 않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토마스는 방대한 양의 저작을 남겼다. 그의 저술은 크게 두개의 대전(신학대전, 철학대전), 주석서(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 형이상학, 정치학, 니코마코스 윤리학 등) 및 토론문제집(29개) 등 세 범주로 분류된다.
어떤 철학자나 사상가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하여는 그가 살았던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 대하여 고찰할 필요가 있다.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를 이해함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중세 스콜라 철학을 집대성한 그의 업적이나 위상이 그 당시의 역사적 배경 없이는 제대로 평가될 수 없기 때문이다. 중세철학은 시기적으로 교부철학과 스콜라철학으로 구분된다. 2세기에서부터 아우구스티누스가 죽은 해인 430년까지를 교부철학의 시기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 시기에는 교리 확립의 필요성에 따라 교회의 지도자들인 교부들의 노력으로 신학이 형성되고 근본교의가 확립되었다. 다른 종교사상과 철학으로부터 기독교를 보호하고 그 순수성을 지키는 것을 당면과제로 여겼던 교부들은 철학을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교리가 확립되고 교권이 확고한 기반을 잡게 되자 9세기 즈음에는 여러 곳에서 성직자들을 교육하기 위한 학교가 수도원과 성당에 부설되었다. 스콜라(schola)란 이러한 학교를 뜻하는 말이며, 또 이 학교에서 가르치거나 배운 사람을 스콜라 학자라고 했다. 스콜라 철학이라는 용어도 이에서 유래한 것이다. 스콜라 철학자들은 신앙에 의하여 이미 불가침의 진리라고 인정된 것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것을 과제로 삼았는데, 이때 그들은 이를 위하여 그리스 철학의 방법과 개념을 사용하였다. 상당히 오랫동안 이성보다는 신앙이 상대적 우위를 지키고 있었으나 11세기 말부터 시작하여 13세기 후반까지 약 2세기에 걸쳐 계속된 십자군 전쟁으로 인하여 서양세계는 이슬람세계나 비잔틴제국과의 접촉을 하게 되었는데 이는 서양세계에 무시할 수 없는 변화를 야기하였다.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동방의 생활, 문화, 약품 등이 유입되고 동방과의 교역이 늘어남에 따라 서유럽의 도시와 상공업의 발달이 촉진되어 봉건제도의 몰락에 일조를 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영향은 철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데, 이슬람을 통하여 전해진 그리스의 철학,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중세학문의 판도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연구가 진전됨에 따라 학자들은 신앙에 대하여 이성의 우위를 주장하는 입장과 이성보다 신앙이 앞선다고 주장하는 입장으로 나뉘어 대립하게 되고, 이것이 중세 스콜라철학을 지배하게 되는 ‘보편논쟁’(普遍論爭) 안에서 만나 이론적인 투쟁을 하게 된다. 보편논쟁이란 보편적 관념의 실재 여부를 놓고 대립한 실재론과 유명론의 대립을 말한다. 이 문제는 그 당시의 스콜라 철학자들이 풀어야 할 과제로 부여되었다. 어떻게 아리스토텔레스적 사상이 기독교 사상에 위배되지 않은 채 수용될 수 있는가, 이 둘의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는 우주관은 어떻게 극복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 중세사상가들의 당면과제로 등장한 것이다. 아무튼 그때까지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일련의 시도들은 모두 실패에 그치고 말았는데, 토마스는 이를 탁월한 방법으로 풀어낸다.
토마스는 신학과 철학을 분리된 것으로 이해하지 않았고, 배척하는 것은 더욱 아니라고 본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인간이 스스로 알 수 있는 자연적인 것을 신앙의 대상이 되는 초자연적인 것과 함께 사유하고자 하며, 그것도 자연과 초자연, 이성과 신앙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권한을 완전히 인정하면서 고찰”하는 것이다. 토마스는 그 길에 있어서 성서에 기초하여 아리스토텔레스를 받아들이는데, 아리스토텔레스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방법에 있어서 뿐만이 아니라, 동시에 그의 세계관까지도 수용하는 것을 뜻한다. 즉 이는 “객관적 존재뿐만 아니라 인간 자신의 모든 자연적 현실성에 대한 어떤 동요도 없는 확실한 긍정을,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에 이어져 내려온 가치관에 있어서 세계라는 개념에 들어오는 것에 대한 긍정”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그는 신학주의와 합리주의의 일면성을 극복하고 “신학적 근거를 가진 세계관과 개방된 신학”을 가지는 것이다.
토마스의 이론을 하나의 거대하면서도 통일된 체계라고 부르는 것은 그의 기본적인 논리가 그의 모든 저술에 일맥상통하게 흐르면서 서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한 이유로 하여 토마스의 사상 중에서 어느 한 부분만을 따로 떼어내어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거니와, 만약 그것을 시도해 본다면 잘못 이해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교육론을 고찰하면서 이에 꼭 필요한 부분만을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토마스에 의하면 모든 물질적(질료적) 사물 또는 실체는 실체적 형상과 제일질료로 구성되어 있다. 형상과 질료는 다같이 실체의 구성원리이자 구성요소이다. 형상이란 현실의 사물에 대한 물체적 기체이며, 질료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형상에 의해서만 즉 어떤 형상과 결합할 때에만 존재한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보자. 질료란 일종의 가능태이다. 공기가 불꽃으로 변한다면 이는 공기가 불꽃으로 변할 가능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다. 공기와 불꽃에 공통적으로 있는 질료는 확실히 상호 변할 수 있는 것들의 능력이다. 그러나 불꽃의 가능태가 공기의 형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즉, 공기는 공기의 형상을 가지고 있고 또 동시에 가능태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질료란 어떤 형상과 결합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고 또한 주어진 형상과 분리되어서도 동일한 질료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배운다는 것, 지식을 얻는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토마스가 변화란 가능태에서 현실로의 이행이라고 했듯이 배운다는 것도 변화이므로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가운데 가능적으로 존재하는 지성이 현실태로 옮겨지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지성은 가능적인 것에서 현세적으로 나아가지만 가능태에서 한번에 곧바로 완전한 현실태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감각에 의한 인식을 예를 들어 이 과정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공간 안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한 사람을 보게 될 때에는 거기에 있는 것이 동물이라는 것을 인식하기 전에 한 물체,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기 전에는 한 동물이라고 인식하게 되고, 그 다음에야 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또 더 나아가서 그 한 사람이 소크라테스인가 플라톤인가를 알아차리기 전에는 그냥 한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다.
토마스는 지식의 획득에 있어서 교사의 활동 내지 역할을 설명하면서 의사의 활동을 예료 제시한다. 환자가 병이 들었다가 회복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환자의 병은 자연적으로 치유되기도 하고 의사의 치료로 회복되기도 한다. 전자의 경우는 체력이라는 자연적인 힘을 빌어 즉 내적 원인에 의하여 병이 치료되는 것이며 후자의 경우는 의사가 병을 낫게 하는 외적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의술을 사용하여 병을 치료한다. 이 두 경우에 있어서 차이점은 어디에 있는가? 질병이 자연적으로 치유될 수 있었다는 것은 치유의 내적 원인인 즉 환자의 내부에 잠재한 자연치유력이 건강을 회복하기에 충분한 작용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환자의 내적 작용력이 병을 치유하기에 충분하지 않을 때 의술이 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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