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MOYENAGE리용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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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LEMOYENAGE리용의 시대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LE MOYEN AGE
Un Long 13 Siecle
1) 리용의 발전
쏜강의 왼쪽 지역에서 9세기에 자리 잡은 리용은 점차 커져갔다. 이것은 11세기 전에 놓인 다리의 역할이 켰다. 이 시기는 1170년대와 1340 년대 사이에 리용의 서쪽 경계선이 정해지고 Valdo( 발도파: 12세기에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속인의 속빈 설교단으로서 리용의 상인 발도가 만들었다. 1175년 제 3회 라테란 공의회 때 교황 알렉산드르 3세 때 그에게 사제의 허가를 조건으로 선교활동을 인정했다. 1184년 루키무스 3세의 이단 금압령에 의해서 < 리용의 빈자> 라는 이름으로 이단으로 단죄되었다. 지금도 이만명의 신도들이 이탈리아의 페에몬테 지방에서 독자적으로 교회활동을 하고 있다)의 후유증을 겪고 있는 중요한 시기에 확장을 계속하였다. 이 시기에는 또한 프랑스 왕과의 사이가 돈독하여 시민들은 왕에게 잘 보이면서 또한 경제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그 시기에 왕, 교회, 공의회가 리용 안으로 옮긴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 시기는 한마디로 시골이 어둠을 벗어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영주와 시민들의 경제적인 삶이 예전과는 사뭇 달라졌다. 서쪽의 구릉지대에 사는 사람들은 덤블 , 히드뿌리등과 같은 숲을 개간하여 호밀을 생산하며 경제적인 발전을 이루었고, 동쪽의 사람들은 그와는 반대로 고원지대에서 마을을 이루었고 주로 땅에서는 포도를 재배하였다. 쏜강과 론강의 만 지역은 리용의 주요 포도재배 지역이었다. 이때에 인구는 더욱더 밀집했으며 개간이 이루어졌고 변화가 두드러진 시기였다.
2) 교역의 중심지 리용
리용은 이구 20000만으로 1245년 이루 이탈리아와 함께 교역의 중심지로 성장하였다. 리용은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연결하는 쥐라지방과 clerment 와 puy 산을 잇는 교역로를 발판으로 시장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서쪽으로는 알프스 산맥을 잇고 동쪽으로는 높은 고원의 길을 바탕으로 하여 교역로를 개발하였다) 이러한 경제발전에 도움을 준 것이 다리의 건설이었다. 최초의 guilletiere 의 다리를 시작으로 avignon 까지 다리건설이 이루어 졌다.( 책에서는 avignon 의 다리건설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1193년 리용의 부르주아들은 대주교 Renaud de Forez 에게 20000을 빌려주는 댓가로 상업에 대한 억압과 중지를 받지 않을 권리를 얻었으며 1206년에는 상업사회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아 자유롭게 상업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대표적인 부르주아로 성을 소유하며 Constantinople( 동로마 제국의 수도. 1204년 십자군에 의해서 점령당하였고 1261년 미카엘8세에 의해 수복되었다. 1453년 5월 29일 오스만 투르크제국에 의해서 함락 당한다. 콘스탄티노플은 천년의 영광이 살아 숨 쉬는 도시였으며 고도의 비잔틴문화를 간직한 도시였다.) 과 시골에서 시장을 시작한 Ponce de Chaponay를 들 수 있다. 이 시기는 리용이 경제적으로 매우 발달하는 시기였으며 부르주아들의 의식이 점점 더 개방되어 가는 시기였다. 이러한 현상은 나중에 교회와의 심각한 갈등을 겪는 원인이 된다.
3) 부르주아와 교회와의 대립
13세기에 들어와 리용 사람들은 정치혁명을 필요성을 깨우치기 시작했다. 1226년까지 Renaud de Forez의 영향아래 있었기 때문에 상업 활동이 과 정치가 자유롭지 못하였다. 1222년 beaujeu 왕은 교회와 대립하며 리용의 사람들과 Beaujolais 사람들에게 상업에 대한 이전과는 다른 제도를 두었다. Beaujolais 와 Villefranche 가 12세기 중엽에 Beaujeu 완의 영향아래에서 자치권을 인정받은 작은 마을이었다. 이렇듯 부르주아들이 자유로운 상업을 하고자 하였을 때 교회는 그저 도시 해방의 움직임을 막아서는 요인이었다. 그 후에 교회와 부르주아 사이의 갈등은 더욱더 심해져 갔다. 그러는 사이 큰 사건이 일어낫다. 1269년 리용 사람들은 마을 밖의 교회영토를 약탈하였고 교회의 수도참사 회원들은 Saint-just 의 수도원 안에 숨어들어갔다. 이는 당시 교회와 시민사이의 갈등이 얼마나 심했는지 가늠하게 해준다. 이에 사람들은 왕의 보호 아래로 차츰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는 그 동안 프랑스를 지배하였던 교회세력과 왕과의 권력다툼도 치열했던 시기이다. 왕은 교회의 세력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였고 교회를 그러한 현상을 막으려 노력하였다. 그 한 예가 Philippe de bel은 교회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대주교와의 조약을 체결하였으며 1307 에는 왕에게 귀속되어진 대주교의 영토를 리용과 리용 사람들에게 양도하여 주었다.
그 뒤 Pierre de Sovie가 복종을 요구하는 왕에게 반역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계속되는 왕권의 우세 속에서 1312년 4월 법원의 주권이 프랑스 왕에게로 넘어간다.
4) 로서의 리용
리용에서는 지방판과의 관할 지역이 Macon의 대법관에 의해서 조직되었고, 특별히 세금에 대한 분배권리와 의원에 대한 선출권을 가지게 되었다. 이 시점에서 리용은 < 집정의 마을> 이며 < 시민대표> 라 할 수 있었다.
한편 교회는 13세기 말부터 강력해진 왕권의 간섭을 받으며 1309년에는 교황청을 론강의 도시 avignon으로 옮기게 되었고 , 그 뒤 약 70년간 이비뇽에 교황청이 설치되었다. (아비뇽: 예술과 문화의 도시로서 여름에 세계에서 가장 큰 아비뇽 페스티벌이 열리는 도시) 13세기 말부터 교회는 어려운 현실을 타개하고자 사외운동을 재개하였고 비잔틴 문화 결합과 몽골사이의 관계를 맺고자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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