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독립전쟁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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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독립전쟁
독립전쟁...사실 전쟁이라는 단어를 쓴 것 자체가 조금 이상했다. 전쟁이란 국가간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무력싸움이라고 생각했고 그러기에 우리나라의 항일독립전쟁은 일제의 지배를 받고 있던 우리나라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전쟁이 아니라 무력투쟁이나 테러정도로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번 항일독립전쟁을 조사하게 되면서 깨달은 것 중 하나는 독립전쟁 또한 하나의 명분있는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엄연히 선전포고를 했던 임시정부가 있었으며 폭탄 한두개로 겁만 주는 것이 아닌 어느정도의 규모를 가진 무력집단을 양성하고 조직적으로, 그리고 효과적으로 일본에 타격을 줌으로써 단순한 무력투쟁이 아닌 전쟁의 양상을 띠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독립전쟁의 시작은 항일의병전쟁으로 시작되어 1905년에 2차 의병전쟁이 일어남으로써 더 커지게 되었고 일제강점 이후로 조직적으로 광복군, 유격대 등이 만들어져 투사들이 전쟁을 수행하게 되었다. 임시정부의 김구와 지청천을 축으로 만들어진 광복군은 나름대로의 임시정부가 있었고 선전포고가 가능했으며 어찌보면 2차 세계대전에 연합군들과 참전하여 전쟁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독립전쟁을 수행한 무력집단들의 교전은 너무 많아 시간안에 발표하기가 힘들뿐만아니라 정리하기가 어려움으로 가장 중요했던 전투인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를 집중적으로 조사, 발표 되었다.
봉오동 전투는 유격대가 일제 헌병순찰소대를 격파하자 이에 격분한 일본군이 부하 1개 중대와 헌병순사 10여명을 데리고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을 추격하게 되었고 이 때 독립군의 기습작전으로 일본군이 섬멸당함으로써 시작되었다. 화룡현의 삼둔자에서 일어난 이 삼둔자 전투를 보고받은 일본군은 1920년 6월 7일 군대를 이끌고 복수를 위해 봉오동입구로 가게 되었는데 대한독립군의 총지휘인 홍범도장군은 일본군을 섬멸하기 위해 봉오동 주민들과 가축들을 미리 대피시키고 6개 중대를 골짜기에 매복시키고 1개 소대를 내어 적을 안으로 유인하여 오도록 하였다. 유인작전에 걸린 일본군은 사방의 고지에서 총을 쏴대는 독립군들에게 거의 일방적인 학살을 당하고 후퇴하는 도중에도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이 전투에서 독립군은 전사 3명이란 대가로 적 150명을 살상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 후 청산리대첩은 1920년 10월 21일부터 일주일 사이에 김좌진 장군과 홍범도가 이끄는 독립군 부대 등이 중국 길림성 화룡현 일대에서 독립군을 토벌하려는 5,000여명의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대승을 거둔 전투를 말한다.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 군정서 독립군은 대종교 중심의 독립군이었으며 약 600명의 정예병력과 100명 가량의 보충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또한 대한독립군, 국민회독립군,·한민회, 의군단, 신민단 등 5개부대 연합군으로 이루어진 홍범도군에는 1,950명의 병력이 있었다. 약 2500명 가까이 되는 이 독립군은 백운평 전투, 완루구전투, 천수평전투, 어랑촌전투에서 연전연승을 거두며 일본군 5만 병력을 2,500명으로 맞아 3,300명을 사살하였다. 이 전투는 항일독립전쟁사에서 가장 큰 전과이며 가장 유명한 독립전쟁이다.
또 한번의 유명한 전투가 있었는데 남한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보천보 전투이다. 이 전투는 동북항일연군 가운데 김일성이 이끄는 일부 병력이 1937년 6월 4일 함북 갑산군 혜산진 보천보 일대를 잠시 점령한 사건이다. 그들은 경찰주재소, 면사무소, 우체국 등의 관공서와 산림보호구 등을 공격하고 포고문과 격문을 살포하고 물자를 노획하였다. 그 후 돌아가는 중에 추격한 일경들과 교전을 벌여 일경 7명을 사살하였다. 이 전투로 인해 조선에 김일성이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 때의 김일성이 북한의 지도자인 김일성과 동일인물인지는 아직도 논란에 있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김일성이 너무 어렸기 때문이다. 사실 진위여부가 확실하지 않은 전투라 발표에서 빠졌던 것 같다.
이 외에도 크고 작은 교전은 수도 없이 많이 일어났으며 조발표 당시 교전의 일부만 조사하는데도 끝이 없었다. 이하는 당시 조사했던 교전들이다.
1895년 제 1차 의병전쟁 (을미의병)
1905년 ~ 1915년 제 2차 의병전쟁 (05 병오의병, 07 정미의병)
1907년 8월 한국군의 항전
1919년 홍범도의 독립군이 국내진입전 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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