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풍속사] 과학기술의 도입과 생활양식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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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풍속사] 과학기술의 도입과 생활양식의 변화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 목 차 -

Ⅰ. 서론

Ⅱ. 전기
1. 선정이유
2. 당시 사람들의 인식
3. 전기도입 역사
4. 도입 이후 나타난 실상 및 생활양식의 변화
5. 역사적 의의/평가

Ⅲ. 철도
1. 선정이유
2. 철도의 도입역사
3. 생활양식의 변화와 사고사례
4. 철도에 대한 아픔과 항일 운동
5. 역사적 의의

Ⅳ. 의료
1. 선정이유
2. 당시의 정세와 인식
3. 의료의 도입과정
4. 일본이 조선진출에 병원을 이용하는 모습
5. 역사적 의의와 아쉬움

Ⅴ. 결론
본문내용
(2) 전차

전차 운행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조선 정부가 막대한 자금이 드는 전기 철도 부설 사업을 추진한 이유는 여럿 있으나 중요한 몇 가지를 들면, 첫째 한성부 도시 개량 사업의 일환이었고, 둘째 명성황후를 안장한 홍릉까지 근대적 교통 수단으로 왕의 행차를 간소화하여 비용을 줄이려는 재정상의 고려, 셋째 재정 고문의 교체로 생긴 여유 자금 10만 달러를 안전한 곳에 투자하려는 고종의 고려도 배경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한제국을 반포하면서 정부는 광무개혁의 일종으로 식산흥업을 강력하게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는데, 전차 가설 사업이 근대화 정책을 가시화할 만한 가장 적절한 사업이라고 인식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러한 고종의 적극적인 의지에 힘입어 전차와 전등 사업을 전개할 한성전기회사 설립이 조속히 추진되었다. 이 회사는 대한제국이 성립되면서 고종의 권한이 강화된 지 한해 만에 설립되었다. 한성전기회사가 제일 먼저 전개한 것은 전차사업이었다. 이 회사는 1898년 서대문~종로~홍릉, 1899년에 용산~남대문~종로, 1900년에 남대문~서대문 등의 전차노선을 확정했다. 이 전차 노선들은 황실과의 관계를 원활하게 하고 정부의 근대화정책을 가시화하며, 식산흥업 정책을 실질적으로 지원할 뿐만 아니라 회사 수지를 개선하는 방향으로 계획되었다. 이들 노선의 종점은 경인철도, 경부철도, 개성선 등 그 당시 부설하기로 되어 있었던 철도역과 연계될 수 있도록 계획되었다. 김영식·김근배 엮음, op. cit., p. 137


4. 도입 이후 나타난 실상 및 생활양식의 변화

(1) 전등과 전신

1887년 최초 전등 점화에 성공하기는 하였지만, 전등 사업은 예상처럼 순조롭게 진행되지는 못하였다. 설비 비용, 발전 시설 운전에 소요되는 석탄 등 연료 비용, 외국 기술자 초빙에 따른 비용이 너무 높았기 때문에 전기 점등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는 사람들도 등장하였다. 대표적으로 지석영, 임원상이 상소를 올려 전등 점등을 비판하였다.
게다가 점등된 전등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툭하면 고장이 나서 전기가 들어오지 않기 일쑤거나 소음도 심해서 사람들은 당시 전등을 ‘건달불’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국사편찬위원회, op. cit., p. 14

1900년 4월 10일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종로에서 세 개의 전등(가로등)이 점등되면서 사람들은 황실 밖에서도 전깃불을 구경할 수 있게 되었다. 일반 가정에 전기가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가로등이 등장하고 그로부터 약 한 달이 지난 후이다. 당시 진고개에 거주하던 일본 상인들이 전등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전등 점등은 한성부민들로 하여금 서구문물에 경이로움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이 경이로움이 곧 영업으로 연결되지는 못했다. 전등 사용료가 매우 비쌌기 때문인데, 32촉광 전등 1개의 한달 사용료가 일등미 3, 4말에 해당할 정도였다. 그뿐만 아니라 전등을 신설할 때의 신청료나 부대비용도 비쌌기 때문에 전등영업은 매우 제한된 지역에서 행해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렇게라도 시작된 일반 가정에 대한 전기 보급은 일제 침략과 더불어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였다. 일제 강점기 동안 전기 공급은 주로 일본인과 상류층 또는 관공서, 회사 등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일반 가정의 전기 보급률은 무척 낮아서 1929년에는 약 6%, 1942년에 이르러서도 17.5%에 불과했다. 이런 보급률은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 심한 불균형을 보여주고 있었다. 1940년까지 조
참고문헌

○ 단행본
한국역사연구회,「우리는 지난 100년 동안 어떻게 살았을까」(서울: 역사비평서, 1998)
김영식·김근배 엮음,『근현대 한국사회의 과학』(서울: 창작과 비평사, 1998)
국사편찬위원회,『근현대 과학 기술과 삶의 변화』(서울: (주)두산동아, 2005)
박성래·신동원·오동훈 지음,『우리 과학 100년』(서울: 현암사, 2001)
박천홍,『매혹의 질주, 근대의 횡단』(서울: 산처럼, 2003)
박윤재,『한국 근대의학의 기원』 (서울: 혜안, 2005)
○ 논문
이안호, “철도건설의 역사적 고찰”『토목역사탐방 제50권 제2호 2002년 2월』
이용상, “한국철도사에 관한 기초연구”『한국철도학회논문집 제8권 제1호 2005년』
○ 신문
New York Herald, October 15, 1883
『독립신문』, 1897. 10. 10
『황성신문』, 1903. 7. 11
○ 인터넷
『고종실록』고종 36년(1899년 기해/대한 광무(光武) 3년) 5월 30일 양력
“전차 사장과 민영기를 추궁하도록 하다”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clsName=&searchType=a&query_ime=%EA%B3%A0%EC%A2%85%EC%8B%A4%EB%A1%9D&keyword=%EA%B3%A0%EC%A2%85%EC%8B%A4%EB%A1%9D (2010년 9월 23일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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